<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3-팔레르모&체팔루>

팔라티나 예배당을 나와 호텔에서 짐을 찾았다. 택시를 타고 팔레르모 항구로 갔다. 항구 근처로 가니 덩치 큰 차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혹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짐을 싣고 오가는 화물 트럭들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4차선 정도 되는 신호등 없는 도로를 건너 AVIS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보통 험난한게 아니었다. 이 자그마한 길에서 시칠리아인의 운전 습성을 제대로 체험했다. 크락션과 하이빔과 무깜빡이 끼어들기 등등… 그나마 다행인건 일단 사람이 들이대면 차가 서긴 선다. 뭐라고 욕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못 알아들으니 노상관.

AVIS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차를 픽업하러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선 아까 그 길을 다시 건너야했다. 그래도 두번째 건너는 길이라고 좀 더 대범하게 발걸음을 내딛었으나, 그래도 쫄긴 쫄았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엔진 소리와 클락션 소리가 뒤섞인 항구의 도로는 어지러웠다. 사무실 직원이 차량 픽업 장소를 알려줬는데, 한번에 못 찾아가고 빙빙 돌면서 헤맸다. 사무실에 다시 찾아가서 물어봤는데도, 못찾아서 항구에서 일하는 아재들한테 길을 물었다. 어차피 단어가 많이 들어갈 수록 못 알아들을 가능성은 높아지니깐, “where is AVIS” “Dove AVIS” 딱 이렇게만 외쳤다. 아 그전에 “Parli inglese?”를 물어보긴했다.

문제는 영어를 못하는 아재들도 흔쾌히 “Si!!”를 외치셨다는 것. 아재는 엄청 빠른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나는 영어로 더듬거리고… 의사소통이 될리가 없다. 손짓발짓으로 왼쪽 오른쪽 느낌적인 느낌을 이해하는 중에 아재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지나가는 다른 아저씨를 불렀다. 이 아저씨는 ‘잉글레제’가 좀 된다는 것 같았다. 잉글레제가 좀 되는 그 아저씨는 그래도 손짓발짓 시니스트라 데스트라 대신 레프트 라이트라고 말이 통하는 분이라 그 덕인지 한참만에 AVIS 간판을 발견하고 차를 찾았다.시칠리아의 좁은 길에 딱이라는 도요타 야리스를 몰고 팔레르모 시내를 빠져나갔다. 아까 건너면서 기겁했던 그 4차선 도로를 빠져나가는게 좀 헬이었던걸 빼곤, 모든게 무난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구글을 찬양하게 됐는데, 그 계기가 바로 길치 둘을 구원해준 구글네비님이시다. 유럽 렌트카 여행 다녀온 사람마다 구글네비 타령을 하길래 대체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네비를 켜자마자 아이나비 따위보다 훨씬 정확한 도로정보를 ‘한국말’로 알려줬다. 아무튼 구글네비를 따라 거의 안 헤매고(구글네비 달고도 헤맨 적은 있는데 대부분 구글네비가 2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는데 멍때리다가 지나친 것). 아,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이탈리아 차에는 선팅이 된 차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강렬한 직사광선이 내리쬘 땐 얼굴과 상반신이 함께 이글이글탄다. 좋은 점(?)도 있는데 룸미러로 뒷차 운전자 표정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눈치를 주면 알아듣기 쉽다는 말이다. 어쩌다 옆차랑 시비가 붙으면 문을 내리고 어차피 운전자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욕을 하는 대신, 안면근육을 놀려 빡침을 표현할 수 있다.

▲시칠리아 도로를 달리다가

팔레르모 도심을 벗어나자 평화로운 시골 벌판 사이로 쭉 뻗은 도로가 나타났다. 체팔루로 가기 위해선 시칠리아 북서쪽 해안도로를 거쳐야했다. 오른쪽으로 새파란 코발트 블루의 바다가 보이는 길을 한시간 정도 달려 Cefalù라는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산에 만든 성벽 아래로 빨간 지붕 건물과 우뚝 솟은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이정표를 읽지 않아도 그곳이 체팔루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체팔루는 산이라고 하기엔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엔 높은 작은 산등성이에 자리한 마을이다.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는데 해안선은 산쪽으로 움푹 들어간 U자 모양이다. 그 해안선에서 시작된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산 위에 남아있는 로까(rocca 요새) 입구까지 닿는다. 급경사가 시작되는 어귀에 기차역이 있었다. 구도심 한가운데는 이탈리아 운전할 때 최고 짜증나는 ZTL 적용구역이었으므로, 아예 접근할 생각을 접고 기차역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해안가와 로까를 잇는 길. 체팔루. Cefalù

해안가로 내려갔다. 마을이 감싸 안은 해안선에는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랬고, 바다는 그보다 더 새파랬다. 아주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바닷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장면을 머릿속에 재생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었던 1980년대나 지금이나 체팔루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들쑥날쑥한 네모 건물들이 영화에서보다 아주 조금 더 낡아보일 뿐이었다. 비수기라 조용한 해변엔 간식을 들고 소풍을 나온 동네사람들만 삼삼오오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해변. 여기 어디에선가 '시네마 천국'을 촬영했다. 어차피 물에 안들어가는 사람에겐 비수기 바닷가가 훨씬 좋다. 체팔루. Cefalù

해안가에서 시작된 골목으로 들어가자, 노랗고 네모난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레스토랑을 찾아봤는데 5위권 안쪽에 들어가 있는 집들은 비수기라 그런가 문을 닫았거나, 동선을 고려했을 때 찾아가기에 영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다. ‘1등 아니면 싫다’던 박 기자도 배가 고팠는지 조용해졌다. 할 수 없이(…) 무려 트립어드바이저 6등에 오른 ‘Locanda del Marinaio’에 가기로 했다. 와인저장고처럼 둥근 천장의 레스토랑이었다. 배가 너무 고프던 차라 메뉴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해산물파스타와 대구살라비올리를 주문했다.


▲Locanda del Marinaio의 파스타들. 둘다 맛있었지만, 특히나 해산물 파스타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재료로 대단한 맛을 냈다.

이 집은 식전빵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겉은 거칠고 속은 보들보들한 빵이었는데 향이 진한 올리브유에 찍어먹는게 어찌나 맛있던지… 원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면 식전빵 잘 안먹는데 순식간에 빵 한접시가 뚝딱 없어졌다. 조금 기다리다보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해산물 파스타는 인생파스타였다. 이렇게 평범한 메뉴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다. 딱히 뭐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은 오일베이스 파스타였는데, 신선한 재료를 도대체 어떻게 익힌건지 연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최고였다. 면에도 해산물의 맛이 깊게 배어 밀가루 면만 씹어도 심심하지 않았고, 생면을 딱 적당한 정도로 쫄깃하게 익었다. 한접시가 사라지는게 아까울 정도로 최고의 파스타였다. 다음에 시칠리아에 간다면 이 파스타를 다시 먹기 위해 체팔루를 갈 용의가 있다.

박기자가 시킨 대구살 라비올리도 한국에서 못본 음식인데, 해산물 파스타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지만, 신선한 재료를 솜씨좋게 요리한 디쉬였다. 꽉 채운 대구살이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탱글거려서 조금 놀랐고, 라비올리피도 딱 적당히 익어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체팔루 거리를 걸었다. 두오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서있는 팻말을 읽지 않아도, 가장 우뚝 솟은 종탑을 찾으면 되니깐. 하긴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에서 ‘모든 길은 두오모로 통한다’.

체팔루 두오모는 이제 조금 봤다고 익숙해진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규모는 몬레알레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것 같지만(몬레알레를 안갔으니) 내부 모자이크가 팔라티나 예배당이나 몬레알레 대성당과 비슷한 스타일로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음… 근데 성당이 닫혀있었다.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데 아그리젠토로 가야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할 수 없이 두오모 광장의 조그마한 젤라또집에서 젤라또를 사들고 먹으면서 두오모 외관이나 감상하기로 했다.

▲조그맣지만 포스는 작지 않았던 체팔루의 두오모. Duomo di Cefalù

겨울 유럽여행의 안좋은 점이, 길에서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 먹기 어렵다는 점이다. 4년 전 파리에서 베르티용 아이스크림 테이크아웃해서 먹으려다가 이가 시려 죽을 뻔했었다. 2월에 벚꽃이 만개하는 시칠리아에서는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피스타치오, 초콜릿 같은 평범한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고터 파미에스테이션에 있는 ‘젤라X젤X띠’라는 젤라또집을 굉장히 좋아하는데도 하나에 4000원이 넘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자주 못가고 있다. 진한 피스타치오맛, 초콜릿맛 아이스크림이 두가지맛에 2유로도 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양은 훨씬 더 많다. 본토의 위엄이라고 넘기기엔 한국에서 젤라또 사먹으면 손해보는 느낌을 넘어 눈탱이 맞는 느낌인걸 지울 수 없다.

막상 팔라티나 예배당에서는 내부 모자이크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외관을 볼 정신은 없었던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핥아먹으며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두오모를 눈에 담았다. 이탈리아를 여러번 왔지만 각 도시를 대표하는 두오모는 제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외관이 색다른 시칠리아의 두오모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양파모양 창문, 늘어선 기둥과 아치, 미나레트를 닮은 종탑. 이렇게 생긴 건물들이 서서히 눈에 익어갈 때쯤 아그리젠토로 떠났다. 체팔루에서 아그리젠토까지는 차로 두시간 반 남짓 걸리는 거리. 그러나 마치 다른 나라에 간듯 또 완전히 다른 첫인상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마도 바오밥 나무일 것이라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가로수로 바오밥나무라니! 아그리젠토 가는 길

▲'신들의 도시' 아그리젠토로 가는 길. 펼쳐지던 벌판에서 갑자기 신전이 튀어나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계속>



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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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2- 서울&팔레르모>

결혼식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가버렸다.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던 것 같고, 하도 웃는 표정을 고정시킨채 사진을 찍느라 나중엔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던 것 같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았을뿐이다.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식이 끝나고 프레스센터 로비에 내려온 직후부터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이 이미 프레스센터 앞을 가득 채우다 넘쳐 프레스센터 로비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채 한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직원들이 뚫어준 길을 사수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차창 밖 풍경은 기괴했고 약간은 무서웠다. 다시 한번, 이 혼란을 뚫고 결혼식에 와 주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신행 가는 비행기가 다음날 오후라 여유있게 머리도 손질하고 친정집에 놔둔 캐리어까지 들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플라자호텔로 왔다. 호텔에 짐을 풀고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날뿐 아니라 드레스에 육신을 맞추기 위해 두달동안 저녁을 먹지 않은 고행을 겪은지라 허기에 시달리기가 일상이었던 나날이었다. 봉인이 풀렸다는 생각에 두달치 허기가 한꺼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지만 맵고 짠게 몹시 그리웠다. 피부가 뒤집어진다고 한동안 못 먹었으니깐. 남편한테 졸랐더니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둘이 손잡고 르메이에르 빌딩으로 낙지철판을 먹으러 갔다. 불과 몇시간 전 태극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던 자리를 촛불을 든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집에 먼저 간 친구들이 ‘조경수역’이라고 알려준 광화문 사거리 인근 지역엔 아직 집에 가지 않은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섞여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게 희한한 광경을 배경으로 회사 다닐때 데스크들이랑 자주 갔던 식당에서 낙지를 먹었다. 중부라인에서 한겨울에 손이 얼어터지는 와중에 집회 취재하다가 처음 알게된 사내커플의 결혼 첫 만찬으로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낮비행기였기 때문에 저런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날 오후 2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11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보딩패스를 받아들고 면세점 쇼핑을 좀 하다보니 시간이 후딱 흘러 보딩이 시작됐다. 타고갈 비행기는 인천에서 로마로 가는 알리탈리아항공 AZ759편. 이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반 정도(E티켓에는 12시간 55분이라고 나왔는데 실제 걸린 시간은 12시간반 남짓) 가면 로마 피우미치노 시간에 현지시각 오후 7시에 도착한다.

알리탈리아 항공은 처음 타봤다. 프리미엄이코노미석 티켓을 1인당 110만원쯤에 발권했다. 신행 가기 한달 전에 루프트한자 프리미엄이코노미-비즈니스석을 타고 다녀온 스페인 여행이 아주 만족스러워서, 기대했는데 결과적으론 가격대비 만족스러웠다. 루프트한자보다는 작은 듯하지만 그래도 우등고속 수준으로 레그룸이 넓은 편이었고, 발받침이 올라가서 다리가 덜 피곤하다. 기내식이야 원래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원래 지급된다고 알고 있었던 어메니티키트는 더이상 주지 않는 것 같다.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한국어가 지원되지 않기 때문에 이 항공사를 이용한다면 자체 엔터테인먼트를 꼭 준비하시길.

▲여행 중 제일 신나는 순간. 타고 갈 출국비행기랑 인사하는 순간.

▲알리탈리아 프리미엄이코노미석 레그룸은 숏다리를 쭉 뻗어도 안 닿을만큼 널럴하다.

신부 입장곡으로 ost ‘A Whole New World’를 선택했을만큼 어린 시절 베스트 애니메이션이던 ‘알라딘’과,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 ‘말레나’를 기내에서 조금 봤다. 말레나를 조금 보다 만 것은 알라딘을 먼저 봤기 때문에 노트북 전원이 꺼졌으니깐. 영화 속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은 하얗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먹다 자다 깨다 몸부림치는 사육의 시간을 12시간 넘게 버티다보니 모니터에 나타나는 위치는 이오니아해를 지나고 있었다. 드디어 이탈리아 근처에 왔구나.

▲이탈리아 국적기에서 파스타를 먹었는데, 놀라우리만치 맛이 없다. 기내식은 허기를 면하라고 주는 음식이니깐.

▲비행기는 계속 서쪽을 향해 날았고, 해는 서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오니아해를 지나며.

로마공항에 내렸다. 오후 7시 15분. 출발할 때 30분 가까이 늦게 뜬걸 감안하면 선방한 시간이다. 환승시간이 채 두시간이 되지 못한지라, 과연 짐이 사람 따라 무사히 팔레르모 가는 비행기에 탈지 조금 걱정이 되긴했다. 공항 터미널을 돌아다니기엔 몰골이 너무 쩔어있기도 하고 피곤해서 미리 탑승구 앞에 가서 앉아있었다. 오후 9시에 출발하는 팔레르모행 비행기는 밤 10시 30분쯤 도착할 예정이었다. 보딩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밤비행기인데도 만석인 비행기에 타려는 사람들의 얼굴엔 피곤이 묻어있었다. 줄에는 우리 말고도 한국인 한팀, 일본인 한팀이 보였다. 닭장같이 좁은 비행기에 사람이 다 타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뜨겠구나’ 생각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일어났는데도 비행기는 여전히 활주로에 붙어있었다. 시간은 이미 30분 넘게 흘렀는데. 이륙 허가를 받은 비행기들이 줄줄이 밀려있어서 이륙이 늦어진다는 방송이 나왔다. 숙소에 도착할 시간이 대체 몇시쯤일지 조바심이 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눈이 감겼다. 아마 깨워서 일어났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팔레르모 공항에 내려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1시간 10분이 걸린다면서 40분만에 왔다. 슈퍼카의 나라답게 비행기가 슈퍼카급으로 질주한듯.

▲팔레르모 공항. 나름 시칠리아 주도의 관문인데, 카타니아가 더 경제 중심지라 그런가 공항이 그닥 크진 않았다.

공항의 첫인상은 낡고 남루했다. 짐을 찾는 카루젤에 갔는데, 우리 짐이 나오지 않았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만약 짐이 분실됐을 때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돌기 시작했다. 아까 줄 설때 본 동양인 승객 몇명도 우리처럼 걱정스러운 얼굴로 컨베이어벨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짜증과 걱정이 뒤섞여 두리번거리던 눈에 ‘Baggage from non EU countries’ 사인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물어물어 non EU 국가에서 온 짐이 따로 도는 카루젤에 가보니, 눈에 익은 짐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럽을 여러번 다녔지만, 이렇게 아예 컨베이어가 따로 돌아서 사람 당황스럽게 만드는 공항은 처음이었음…

팔레르모 공항에서 팔레르모 시내까진 30분이 넘게 걸린다(고 구글맵님이 말해주셨다). 도저히 이 야밤에 초행길을 공항버스 타고 내려 찾아갈 자신이 없으므로, 그리고 우린 신혼여행 중이므로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내로 가는 도로 양옆으로 펼쳐지는 야경에 이런저런 설명을 매우매우 자세하고 친절하게 해주었다. 내 짧은 이탈리아어와 아저씨의 짧은 영어의 콜라보로 청해율은 60% 정도될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건 팔레르모 시내, 저쪽 보이는덴 항구, 팔레르모에서 남쪽으로 얼마나 가면 몬레알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호텔 문앞까지 택시가 진입할 수 없어서, 기사 아저씨가 ‘콰트로 칸티’까지 가서 내려주겠다고 했다. 야밤에 낯선 길에 내리는걸 걱정하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저씨는 택시에서 내려 짐을 꺼내주면서 “저기 보이는 ‘따박’ 간판에서 10걸음 걸어가면 호텔 문 앞이다”라고 알려줬다. 택시에서 호텔 문앞까지 거리는 대략 20미터 정도. 친절한 아저씨 덕에 팔레르모의 첫인상이 좋아졌다.

콰트로칸티에 있던 호텔 이름은 ‘Eurostars Centrale Palace Hotel’. 오래된 옛날 저택을 개조한 호텔이라 로비부터 매우 고풍스러웠다. 건물이 ㅁ자 형으로 생겨서 가운데는 중정이 있고,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1층 곳곳엔 화려하게 살롱스타일로 꾸며놓은 휴게 공간에서 차나 초콜릿을 먹을 수도 있었다. 리셉션 직원의 친절도는 쏘쏘한 편. 너무나 감동적인 서비스는 아닐지라도, 불편하지 않게 챙겨주는 정도라 나쁘지 않았다. 1박 잠만 자다갈 호텔이라 시내 가까운 곳에 수페리어 더블룸으로 예약했는데,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침구도 깨끗한 편이었다. 객실 곳곳이 낡아서 수리가 필요한 곳이 보이긴 했지만. 도심 곳곳이 낡아가고 있는 팔레르모의 모습에 어울렸달까. 심각한 문제는 딱 한게 있었는데, 샤워기 헤드 부분이 지저분해서 좀 찜찜했다.

그냥 호텔에서 짐풀고 잘까 하다가, 그래도 하루 묵는 팔레르모의 야경이 아까워서 밖으로 나섰다. 쇠락한 도시 같은 분위기, 시칠리아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걱정어린 시선이 조금 걱정되어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것도 불안했는데 웬걸. 그날 무슨 축제라도 있었는지 길에 사람도 많았고, 거리 곳곳에 색종이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 택시에서 내린 콰트로칸티는 정신차리고 보니 더 아름다웠다. ’네개의 모서리’라는 뜻의 ‘콰트로 칸티’는 팔레르모의 가장 큰 도로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와 마께다 거리가 만나는 사거리였다. 사거리의 모서리의 건물은 분수대와 조각으로 장식돼있다. 장식은 삼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가장 아래쪽 분수는 사계절을 뜻하는 여신상, 2층 발코니는 스페인왕들의 입상, 가장 위쪽은 팔레르모의 수호성녀상이 서있다. 오렌지빛 조명이 아름답지만 낡은 조각을 비췄다.

▲사거리 하나만 잘 꾸며놔도 이토록 인상적이다. 콰트로 칸티의 야경. Quattro Canti..

마께다 거리를 따라 쭉 북쪽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길이 좀 넓어지더니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공터가 나타났다. 왼쪽에 그리스 신전을 닮은 큰 건물이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건물이다. 구글맵을 켜고 보니 예상하던 그 건물이 맞았다. 영화 ‘대부3’에서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소리없이 절규하던 그곳. 마시모 극장이 위풍당당하게 눈앞에 서 있었다. 오늘 공연을 막 마쳤는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을 깐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날 공연은 시칠리아 출신 작곡가 벨리니의 ‘노르마’. 시간이 맞았으면 보고 갔을텐데 아쉬웠다. 내가 노르마를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밌다’는 표정으로 봤으면, 남편 박모씨는 그 표정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신기하게’ 보다가 옆에서 잤겠지.

▲마시모 극장. Teatro Massimo. 낮에 봐도 멋졌겠지만, 영화 '대부' 시리즈의 팬이라면 밤에 가는게 좋은 것 같다. 가족들과 오페라를 보고 나오던 메리 코를레오네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에서 총에 맞아 "Dad..."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 무쇠같은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절규하는 영화 속 장면도 이날처럼 오페라가 끝난 저녁시간이었다.

아쉬웠지만 마시모극장에서 사진만 열심히 찍었다. 큰맘 먹고 들고온 DSLR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데, 온갖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던 우리를 바라보던 한 무리의 젊은애들이 있었다. 그중 한명이 다가와서 “사진 찍어줄까?”하고 물었다.

다가온 남자의 영국식 영어 억양이 굉장히 유창하고, 일행이 고급진 행색이라 사실 조금 망설였다. 고물 갤럭시노트로 찍는 얼큰이 셀카 대신 제대로 인간의 행색이 나온 투샷을 남기고 싶긴 했으니깐. 그래도 ‘먼저 사진 찍어주겠다고 다가오는 외국인은 일단 거절하라’는 여행 상식을 뿌리치지 못했다. 정중하게 “노땡쓰”라 말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꼬레아 델 수드”.

팔레르모의 일요일 밤거리가 생각보다 떠들썩해서 무사히 야경을 보고 호텔로 돌아와서 기절했다. 전날밤 호텔 욕실이 매우 험블해서(특히 물이 나오는 샤워기 헤드부분의 찜찜함) 못마땅했으나, 이튿날 조식은 매우 훌륭해서 언짢음이 조금 풀렸다. 조식에 나온 빵과 아란치니와 블러드오렌지주스가 되게 맛있었다. 아란치니는 시칠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식이다. 토마토, 고기, 야채 등등 다양한 소를 쌀에 주먹만한 사이즈로 뭉쳐서 고로케처럼 튀긴 건데 한개만 먹어도 배불러진다. 2월은 블러드오렌지가 제철이라는데 갈라놓은 오렌지는 정말 핏빛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새빨갛다. 이 동네는 가는 호텔마다 모두 오렌지주스를 직접 짜주는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는데, 호텔마다 가당/무가당 여부, 오렌지 종류 등등이 제각각이라 먹어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러군데에서 블러드오렌지주스를 마셨지만, 이 호텔에서 먹은 새빨갛고 적당히 새콤달콤한 주스가 최고였다.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콰트로칸티를 이루는 비토리오엠마누엘레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를 걸었다. 넓은 공터가 보이더니, 구름 한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적갈색 대리석 건물이 보였다. 푸른색 돔 지붕과 양파 모양 창문, 높이 솟은 첨탑과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벽면, 그와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 성인과 성녀의 조각들, 이곳이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임을 알려주듯 정원을 장식한 야자수. 팔레르모 대성당의 거대한 건물에는 이 도시를 지배한 세력의 흔적들이 그대로 녹아있다. 대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은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모스크로 쓰이다가 다시 대성당의 이름을 되찾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다. 이 도시를 지배하고, 이곳에서 신을 찾았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흔적을 건물에 공들여 깊이 새겼다. 그 때문인지 1000년째 신을 위한 건축물로 그 용도를 지키고 있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듯 위풍당당한 팔레르모 대성당. Cattedrale di Palermo

대성당을 지나 또 5분 정도 걸어가니깐, 드디어 목적지인 노르만궁전이 나타났다. 비토리오엠마누엘레 거리와 맞닿은 면은 궁전의 뒷면이라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선 또 한참 건물과 성벽을 돌아가야 했다. 궁전은 아랍인들이 지었다는 꽤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 궁전에 온건 부속 건물인 ‘팔라티나 예배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팔레르모 대성당과 인근 도시 체팔루와 몬레알레 대성당은 아랍∙노르만 양식의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 중 가장 백미로 꼽히는 몬레알레 대성당에 꼭 가고 싶었지만, 동선이 꼬이는 고로, 과감히 버렸다. 대신 몬레알레 대성당과 가장 닮았다는 팔라티나 예배당을 보기로 한 것. 팔레르모에서 가장 손꼽히는 관광지+현재도 사용되는 주요 관공서 건물인지라 금속탐지기로 검사를 받는다. 궁전 1층에서는 시칠리아 연해에서 발견된 해저 유물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봐도 모르니깐 가볍게 패스하고 바로 2층의 팔라티나 예배당으로 갔다. 미사가 진행중이어서 마음대로 구경할 상황이 아니었다. 궁전의 다른 부분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궁전 일부는 시칠리아 주의회 의사당으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보안이 시칠리아의 다른 명소들에 비해선 보안이 삼엄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의사당 내부에 앉아볼 수도 있었고 궁전으로 쓰이던 여러 방들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공간은 중정과 회랑이었다. 기둥과 기둥을 잇는 아치로 ㅁ자형 중정을 만들었다. 얼마전 스페인 여행 갔을 때 그라나다와 세비야에서 본 무데하르 양식의 건물들의 중정을 꼭 닮았다.

다시 2층으로 내려가 팔라티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미사가 막 끝나 경건한 공기가 남은 예배당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조로운 멜로디의 성가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조개 모양의 성수대에서 성수를 살짝 찍어 성호를 그었다. 시선이 처음 꽂힌 곳은 천장. 8명의 천사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모습이 황금빛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다. 신약 내용과 사도행전을 묘사한 정교한 모자이크화를 채운 금빛 배경이 성당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 외에도 아치와 양파 창문, 아랍식 건물 특유의 복잡한 문양들로 장식돼 있었다. 신을 섬기는 방식은 제각기 달라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이 섬을 거쳐간 정복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나보다. 눈이 빠져라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발을 딛고 있는 바닥에 시선이 멎었다. 바닥을 채운 섬세한 모자이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손이 닿지 않는 먼 곳만큼이나 손을 뻗으면 닿는 곳도 숨이 멎게 아름다웠다.

▲경건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Cappella Palatina

▲황금빛 천장 모자이크만큼이나 바닥을 가득 수놓은 모자이크 또한 환상적이다.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Cappella Palatina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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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1- prologue>

신혼여행 갔다온지 약 한달이 되어간다. 남편 박모(32)씨의 말에 의하면 이게 신행인지 극기훈련인지 패키지 여행인지 알 수 없는 난이도 상상상의 여행이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간 다녀온 유럽 여행 중 가장 여유가 넘치고 웰빙 돋았으며 즐겁게 먹고 마신 여행이었다.

사진을 미리 좀 올리긴 했지만 여행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중부지역으로 갔었다. 9박 11에 이르는 여행 기간 동안 5박은 시칠리아에서, 4박은 이탈리아 중부지역에서 머물렀다. 이번에 다녀온 시칠리아와 토스카나주와 움브리아주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중부는 같은 나라지만, 두 나라에서 머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토스카나 주는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압축한 고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단테 알리기에리 같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은 토스카나에서 태어났다. 현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 사투리에서 왔다. 구찌와 페라가모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도 토스카나주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냉정과 열정사이’,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도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탈리아 중부에 머무르는 기간엔 그래서 전형적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즐길 것들을 즐겼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 가까이 갈 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피렌체의 두오모, 오래된 골목 곳곳에 숨어있는 예쁜 가게들 등등.

같은 이탈리아 국경 안이지만 시칠리아의 공기는 토스카나와 전혀 다르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붙어있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이탈리아 중부나 북부에서 볼 수 있는 세련미는 덜하다. 이슬람 왕국과 노르만 왕조의 지배를 거친 섬에는 아직도 이국적인 자취가 남아있었다. 2월말에도 따뜻한 날씨에 꽃이 활짝 만개한 곳은 자로 잰듯 깔끔하게 다듬은 정원이 아니라 아몬드나무와 벚나무를 심어놓은 과수원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섬이었지만, 여전히 불과 연기를 뿜고 있는 에트나 화산을 품고 있는 섬은 문자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하기에 모든 것이 편리한 ‘완성된 여행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것은 둘째치고 4차선 이상의 도로를 보기조차 힘들었다. 피아트 소형차를 몰아도 마음만은 슈퍼카 드라이버인 시칠리아 운전자들은 그 시골길마저 150km로 밟아가며 서행하는 앞차에 하이빔을 갈겨댔다. 비수기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피렌체와 달리, 날씨가 암만 따뜻해도 이 섬 기준으로 ‘비수기’인 2월에 시칠리아의 가게와 식당들은 문을 닫는다. 길 가는 사람에게 영어로 길을 물어 원하는 답을 얻을 가능성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마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시칠리아행을 추천하고 있다. 육지와 비교도 안되는 싼 가격에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까놀리 같은 돌체, 에트나산 화산토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 사면을 둘러싼 바다에서 잡아올린 해산물, 올리브유와 꿀 같은 싱싱한 식재료 등등. 정말 후술할 딱 한군데 빼곤 어디서 뭘 먹든 다 맛있었다. 파랗게 빛나는 바다와 야자수와 만개한 벚꽃과 까만 화산암 위에 쌓인 흰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을 거쳐간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자연 속에 자신들의 흔적을 수놓았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하이빔을 갈겨대며 과속을 종용하다가도 낯선 동양인 관광객이 곤경에 처할 것 같으면 차를 세워가며 도와주곤 했다. 영어를 못해 말이 안통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불러올 때까지 열심히 설명했다.

겨울에 갈만한 따뜻한 여행지 추천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주저없이 시칠리아를 추천하겠다. 아직 동양인 여행자가 흔치 않은 섬에서 정말 ‘외국’에 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참고로 다니는 동안 동양인 여행객은 딱 네팀을 봤다. 한국2, 일본1, 중국1). 이 섬이 보여주는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섬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게 아쉬워질게 분명하다.

▲팔레르모 노르만궁전 내부에 있는 '팔라티나 예배당(Cappella Palatina)'의 바닥 모자이크

▲아그리젠토 근교 해안가, '터키인의 계단(Scala dei Turchi)'

▲아그리젠토, 숙소 옆 과수원에 핀 봄꽃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계곡(Valle dei Templi)

▲시라쿠사에서 카타니아 가는 E45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에 본 에트나 산

▲에트나산 정상...은 아니고 중간쯤에 있는 분화구

▲아씨시, 성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몬테풀치아노 어디쯤인가, Val d'Orcia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Brunelleschi's Cupola of The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항공
: 이탈리아 국적기인 알리탈리아를 이용해 로마 환승편으로 팔레르모나 카타니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번 여행의 경우 알리탈리아 프리미엄이코노미석을 1인당 왕복 110만원에 구매했다. 로마까지의 실제 비행시간은 12시간 30분 정도였고, 로마에서 2시간 남짓을 기다려 팔레르모행 국내선을 탔다. 로마에서 팔레르모까진 1시간 정도 걸린다. 시칠리아를 떠날 땐 카타니아 공항에서 국내선을 탔다. 카타니아에서 피렌체 공항으로 바로 가는 부엘링을 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탑승 시간이 밤 11시로 바뀌어서 취소하고 로마로 가는 알리탈리아를 탔다. 가격은 둘이 비슷하게 한화 10만원 정도. 귀국할 때는 피렌체 공항에서 로마로 가서 환승하는 알리탈리아편을 탔다. 역시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으로 발권했으나, 탑승시 게이트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받았다.

=숙소
: 부킹닷컴으로 모두 예약했고, 9박의 총 숙소 비용은 대략 2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비수기 시칠리아의 숙박비가 쌌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아그리젠토의 ‘Villa Athena’의 경우 5성급 호텔인데 신전이 보이는 좋은 방이 1박에 150유로 정도. 숙소에 대해선 각 포스팅에서 후술할 예정.

=렌트카
: 시칠리아에서는 AVIS를 이용했다. 길이 좁기 때문에 큰 차 빌리면 안된다는 조언을 듣고 갔고, 매우 일리 있는 말이었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차량인 ‘야리스’ 오토를 몰았는데, 차가 작아서 고속으로 달리면 좀 불안하긴 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AVIS의 자체 풀커버리지 보험 덕에 돌 튀는 시골길도 안심하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덤. 로마부터 피렌체까지는 Alamo를 가장한 Locauto에서 폭스바겐 골프를 빌렸다. 차 사이즈나 다른 성능은 나쁘지 않았는데,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스크래치 때문에 385유로를 물었다. 그러나 다행히 렌탈카스닷컴의 풀커버 보험으로 환급 받았음. 아, 여기도 유럽이기 때문에 오토 차량을 몰려면 반드시 미리 예약해야한다. 일단 오토 차량 자체가 많지 않고 스틱보다 비싸다. "꼬레아에선 사람들이 대부분 오또마띠-끄를 모느냐, 대체 왜?? 그럼 마뉴엘-르는 잘 안 모느냐??"라고 의아해하던 팔레르모 AVIS 직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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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식사를 위해 방문한 권숙수. 한식 파인다이닝은 매우 오랜만이라 기대가 컸던 곳이다. 예약이 매우 힘들었다. 통화 연결도 잘 안되고 포잉 앱 답변도 늦었지만 운좋게 한자리가 비어 예약에 성공.


​자리 안내를 받아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소반(?)이 인당 하나씩 놓여있다. 귀여운 사이즈라 매우 탐이 났다. 젓가락질을 하는 음식을 먹을 땐 딱 적당한 높이라 좋았는데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덴 조금 불편한 세팅이긴 했다. 한식 커트러리는 유기 반상기, 양식 커트러리는 큐티폴 누어를 세팅했다.

런치코스는 아페리티브-전식-본식-후식으로 구성돼 있다​

▲ Welcome Drink with Small Appetizer / 우리 술과 작은 안주를 곁들인 주안상

코스는 김포특주와 함께하는 주안상으로 시작. 밤죽, 조선간장을 발라 만든 육포, 곶감과 크림치즈말이, 문어족편, 참죽나물 부각, 감자칩이 나온다. 순한 밤죽으로 시작해 도수가 높지 않은 달달한 술에 안주를 곁들여 이것저것 맛보기 좋음.


​▲ Salted Sea Urchin and Pickled Vegetable with Sea Bream Sashimi / 성게 젓갈과 장아찌를 곁들인 도미회

오늘 식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미 숙성회. 비주얼부터 눈을 사로잡았다. 접은 회 세 점 안에는 성게젓과 당귀 짱아찌를 공통으로 각각 캐비어, 연어알, 산초짱아찌가 들어있고 들기름을 뿌렸다. 잘 숙성된 도미회가 다채로운 색깔을 부각시켜주는 맛.

​▲ House made Dubu with Cold Salad / 특별한 두부 냉채

직접 만든 두부로 만든 냉채. 매일 아침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를 으깨 물기를 빼고 들기름과 채썬 야채를 곁들인 요리였다. 채썰어 나온 저것들에 대해 설명을 들었었는데 까먹... 깻잎 정도의 강한 향은 아니지만 은은한 향이 났다. 두부는 물기를 뺐는데도 부드러운게 치즈의 식감에 가까웠다. 자칫 튀려는 맛을 들기름이 녹아들듯 잡아주는 건 앞에 나온 도미회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닭고기와 시래기를 채운 전병구이. 전병 안에 닭고기, 시래기, 표고버섯으로 만든 소가 들어있고 쪄내서 얇게 저민 애호박과 곰취짱아찌를 곁들여 먹는 요리였다. 닭고기라는 흔한 식재료로 만든 전병과 애호박의 조합이 밋밋해질 뻔했는데, 곰취 짱아찌는 악센트를 주는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

​메인이 나오기 전 샐러리를 곁들인 토마토 소르베로 입가심을 하고...


▲ Grilled Market Fish and Seafood with Maesaengi Crab Porridge / 게살 매생이죽을 곁들인 제철 생선과 해산물 구이

메인은 '게살 매생이죽을 곁들인 제철 생선과 해산물 구이', '민어 솥밥과 제철반상' '40일 숙성 한우 등심구이와 흑임자 두부장', '숙성 한우 등심구이와 흑임자 두부장' 중에서 택할 수 있었는데, 한우 요리는 추가 차지가 좀 쎘다. 앞의 두개 중에 고민하다가 넷 다 해산물 구이를 고르는 웃기는 상황ㅋㅋ 옆테이블에서 민어솥밥 직접 지어주는 걸 보고 저거 먹어볼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매일 달라진다는 오늘의 생선은 가자미였고, 관자, 가리비, 새우, 대게를 구워 매생이 죽과 곁들인 디쉬가 나왔다. 레스토랑의 수준에 어울리게 구운 정도는 훌륭했고, 단백질에 곁들일 탄수화물로 표고버섯으로 악센트를 준 매생이 죽은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다. 메인은 맛있었지만 앞의 코스만큼 '우와'하는 강한 인상은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Sweet Pumpkin ; Pumpkin & Tumeric Soup, Ginger Yogurt Sherbet, Persimmon, Red Bean Cream

/ 단호박 ; 단호박과 울금 스프, 생강요거트 셔벗, 땅콩호박, 단감, 단팥크림, 시트러스 오일

​디저트는 '단호박과 울금 스프, 생강요거트 셔벗, 땅콩호박, 단감, 단팥크림, 시트러스 오일'. 이름이 엄청 긴데, 생강요거트 셔벗 위에 시트러스 오일을 뿌렸고, 단팥크림 위에 얹은 땅콩호박과 단감이 접시에 서브되어 나온다. 먹기 직전 단호박과 울금 스프를 뿌려주는데 색깔이 아주 예뻐서 일단 눈이 즐거웠다. 은은한 생강맛이 감도는 요거트 셔벗은 꽤 묵직한 편인데, 시트러스 오일을 뿌리니 맛이 더 진해졌다. 울금과 단호박 스프 또한 개성이 강한 맛이었는데, 아이스크림과 부대끼지 않고 섬세하게 어울리는 조합이었다는게 신기했다. 도미회나 두부냉채와 함께 인상적인 코스였다.

코스의 마지막으로 차(커피, 루이보스, 하동녹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쁘티푸가 나온다. 깨강정 헤이즐넛 마카롱, 유자카라멜. 마카롱은 별 임팩트랄 것까진 없고, 많이 달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깨강정과 유자향이 은은한 카라멜은 좋았다. 차의 종류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은 들었다. 전통주 페어링이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차 종류도 조금 보강했으면 좋겠다.

권숙수는 작년 말 미슐랭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두개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식당들이 미슐랭가이드 서울편에서 선전하지 못해 조금 아쉽고, 크게 신뢰하지 않던 차에 권숙수는 미슐랭가이드 서울편을 다시 보게끔 만든 식당이었다. 모던 한식 혹은 퓨전 한식당에서 시도하는 무리수가 보이지 않고, 음식 맛 자체는 '진짜 한식'에 가까웠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젓갈, 짱아찌 등 전통적인 발효음식을 다양한 제철 식재료와 좋은 조합으로 풀어냈다는 점이었다. 양식 레스토랑에 가까운 플레이팅을 보고 한입 맛보았다가 의외로 익숙한 맛이 느껴져 살짝 놀라게 되는 재미도 있었다. 런치 메뉴가 저렴하다곤 할 수 없지만 가성비가 훌륭해서 저녁에도 와보고 싶어졌다. 재방문 의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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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가장 더운 오후 2시. 기온은 30도에 육박했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울한 잿빛이었다. 마치 물방울 속에 갇혀있는 듯한 후텁지근한 날씨에 돌아다녔더니, 빳빳하게 다려입고 나온 청남방과 검은색 면바지는 땀과 습한 공기에 절어 흐물흐물해졌다. 갓 입사한 수습기자로 현장에 투입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전국에서 올라온 농민 만오천명이 서울광장에 모여 한중FTA 반대 구호를 외쳤다. 광장의 무거운 공기 속엔 긴장감이 스며있었다.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의 촌부들이 검고 거칠어진 손으로 불끈 쥔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격앙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답답함을 토해냈다. 다양한 말씨와 억양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 속에서 어지럽게 섞였다.

현장을 스케치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지만, 솔직히 광장을 혼자 휘젓고 싶지 않았다. 처음 마주하는 종류의 혼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했다. 언론사에선 대개의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수습기자에게 친절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일이 터지면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처리 방법을 배우길 요구 받았다. 사흘째 되던 날까지 나에겐 ‘큰일’이 닥치지 않았다. 그리고 ‘큰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현장에 나와있었다. 나는 이 중요한 순간을 혼자 판단해 부딪칠 용기가 부족했다. 만명이 어지럽게 뒤섞인 광장 안에서 동료라고 부를 만한 기자들을 어렵게 찾아냈다. 나와 같이 용산경찰서 2진 기자실에서 기거하던 S방송 수습 P와 K신문 수습 K, 이미 수습기자 처지를 벗어난 고등학교 동창인 K방송 S가 광장 한켠 무대쪽에 모였다.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시간은 간만에 맛본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P가 “아 시발”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내뱉었다. 나머지 셋의 시선이 P에게 쏠렸다. P가 선배에게 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 우리가 수다를 떨던 시간에 광장 어딘가에서 이ㅁㅁ 의원이 분노한 농민에게 멱살을 잡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사진이 인터넷에 뜬건 불과 10분여 남짓. 아직까지 회사에선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욕을 무지막지하게 먹을 각오를 하고 1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ㅁㅁ가 서울광장을 찾았다”는 소리에 선배는 흥분했다. 선배가 이ㅁㅁ와 관련된 지시를 내리기 전, 흥분한 그의 말을 잠시 끊고 “그런데..”로 운을 뗐다. 목에 걸려있던 “이ㅁㅁ가 사실 집회에 참석한 농민한테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 멱살을 잡혔다”는 이야기를 토해냈다. 개운치 않았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선배가 바로 물었다.

“사진 찍었지?”

“사실 딴짓하다가 그 장면을 놓쳤다. 이ㅁㅁ가 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말을 마저 뱉었다. 목에 걸려있던 것은 이제 모두 나왔다. 이제 쏟아지는 욕에 귀가 아플 차례였다.

선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조건 이ㅁㅁ 의원을 찾아서 심경을 묻고, 오늘 집회에 왜 참석했는지를 직접 물어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선배와 통화를 마치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02-724로 시작하는 사회부 데스크 번호였다. 당시 캡이었던 L선배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전화를 끊고나서, 수습 첫주에 많은 것을 이미 망쳐버렸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뭐라도 만회해보려면 이제 만명이 넘는 인파를 하나하나 뒤지며 광장 어딘가에 아직 머물고 있다는 이ㅁㅁ를 찾아야 했다. P 본인은 그 순간을 놓쳤지만 용케 촬영기자 선배가 장면을 잡았다고 했다. 수습 말년이던 K는 매체 성향 때문인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S는 수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수다는 넷이 떨었지만, 그 대가를 가장 크게 치러야 할 사람은 보수성향 매체의 사흘차 수습이었던 나였다. “친북 행보를 보였던 이ㅁㅁ 의원이 진보 단체가 다수 참석하고 농민 단체가 주도한 反 FTA 집회에서 ‘빨갱이는 북한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멱살을 잡혔다”는 뉴스는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중요하게 다룰 뉴스거리였다. 
결국 나에게만 '큰일'이었던 것이다. 

고맙게도 S는 이ㅁㅁ 의원과 보좌진이 아직 광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행여 이번에도 놓칠새라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 얼굴을 스캔해가면서 S가 가르쳐준 지점까지 갔다. 창백한 안색에 굳은 표정으로 무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찾았다. 그는 정말 광장에 남아있었다.

나는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이ㅁㅁ 의원을 찾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선배는 지금 그 집회현장에서 말을 걸지 말고, 이 의원이 자리를 뜰 때쯤 따라가서 조용히 멘트를 따라고 지시했다. 한시간쯤 기다렸을까, 앉아있던 이 의원이 보좌진 한명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한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마감시간이 임박했을 때라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어 따로 보고하느니, 계속 통화중인 상태로 내가 이 의원 일행에게 질문을 하고, 그 내용을 선배가 기사로 쓴다고 했다. 

이ㅁㅁ 의원은 서울광장을 나서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건장한 남성 한명이 그를 따랐다. 나도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아직 통화 중 상태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이 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이ㅁㅁ 의원님이시죠?”

창백한 얼굴에 비해 유독 붉어보였던 그의 입매가 웃으며 대답했다.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네 그런데요”

옆에 서있던 건장한 남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자세요? 실례지만 어디 매체 기자이신지?”

“안녕하세요 의원님, C일보….”

말이 끝나기 전 신호가 바뀌었다. 이 의원이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남성이 말했다.

“아시죠? 저희는 C일보랑 인터뷰 안하는 거…”

그들이 대한문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내 걸음도 빨라졌다. 앞에 가는 둘이 대한문 옆 정동길 초입으로 들어갔다. 시청 별관 앞을 지나 시립미술관 쪽으로 계속 걸었다. 어디까지 갈지는 알수 없었다. 시립미술관 앞 분수대가 보일 무렵 그들을 추월해 달려 나갔다. 길을 막아 섰다.

“저기 의원님 한 말씀만 해주세요”

“아니 의원님은 그쪽이랑은 인터뷰 안하신다니까요”

“누구신데 저한테 계속 말도 못붙이게 하세요? 전 의원님 말씀을 듣고 싶은거지 그쪽 말씀을 듣고 싶은게 아니에요

이 의원과 나 사이 공간을 가로막은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이ㅁㅁ 의원실 ㅇㅇㅇ 비서관>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시야를 막으려는 남자를 피해가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무슨 대답이라도 들어내야 수습 초장부터 지시 받은 일을 말아 먹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원님, 아까 농민들에게 멱살 잡히셨잖아요, 심경이 어떠십니까? 농민들에게 하고싶은 말씀 없으십니까?”

“인터뷰 안한다고요”

“의원님께 질문드린 겁니다. 의원님, 오늘 집회엔 왜 참석하셨어요?”

실랑이 벌이는 모습을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멱살 안 잡혔어요”

“멱살 잡히셨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습니다. 농민들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

“멱살 잡힌 적 없어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아까 받아둔 사진이 있었다. 성난 얼굴의 농민이 그의 양복 재킷 앞섶을 잡고 있었다. 그는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에도 찍혔잖아요. 의원님 한말씀만 해주세…”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확 떼밀었다. ‘아차’하는 사이에 돌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은 멀리 날아가 뒹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두 남자는 이화여고 후문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쫓아가기엔 이미 거리가 너무 벌어졌고, 결국 놓쳤다. 그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보니 엉덩이가 시큰하게 아파왔다. 바닥을 짚으며 엉망으로 까진 손바닥에서 피가 비쳤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끊긴 전화를 다시 걸어 선배에게 놓쳤다고 보고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불호령이 쏟아졌다. 정동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쓴소리를 듣는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의식을 육체에서 분리시킬 것 같은 피로감이 길 한가운데에서 쏟아졌다. 걸어야했다. 2진 기자실이 있는 남대문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짝 옮길 때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굵은 장대비가 됐을 무렵 문득 서러워졌다.

서러움이 뿌옇게 머릿속에서 뒤섞이자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나를 밀었나, 내가 질문을 해서,  질문이 잘못됐나, 하지 말아야 하는 질문을 했는가, 그렇다고 나를 떼밀어도 되는건가, 질문을 피하자고 왜 굳이 그런 방법까지 쓴걸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은 던져봐야 답답할 뿐이었다. 바닥에 쥐똥이 널려있는 남대문서 기자실에서 컴퓨터를 켰다. “멱살 잡힌 적 없어요” 한줄이 다음날 신문 기사에 반영됐는지 확인했다. 습기와 불호령과 엉덩방아와 장대비와 불쾌한 질문이 뒤죽박죽 뒤섞인 하루에 마침표가 찍혔다.

+++

뒷이야기.

밤 9시쯤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로 갔다. 1년 전보다 한층 뻔뻔해졌으니 마치 주민인양 태연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29층을 눌렀다.  이ㅁㅁ 의원의 비밀 아지트로 알려진 곳이 거기 있었다. 한참 압수수색이 진행중이었다. 출입을 제지 당해 복도에서 압수수색 장면을 스케치했다. 압수수색을 진행하던 국정원 직원들이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이 의원의 DNA 확보를 위해 칫솔과 빗을 확보한다고 했다.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ㅇㅇㅇ씨, 문 부수겠습니다”

곧이어 연장으로 거칠게 문을 두드려 깨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퍽” “챙”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거친 욕설이 들렸다.

“들어오는 놈은 대가리 박살낸다”

안에서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는지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남자와 바깥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이 사라졌는지 고성이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남자가 복도로 끌려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직원들이 압수품을 가지러 우르르 들어갔다.

“어떠한 부정수사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외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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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도) 일본 아키타현에 갔었다. 아키타에 가는 목적이야 츠루노유 온천이지만 근처에 있는 다자와코 스키장은 정말 끝내주는 곳이었다. 캐나다, 미국, 일본, 한국 통틀어 그간 가본 스키장 중에선 내 기준에선 단언컨대 원탑이었다.


​​​​​​​​​​​​​​수묵화 같이 펼쳐진 준봉들과 호수를 보면서 내려올 수 있고, 트리런 구간도 있어서 크진 않아도 슬로프 구성이 매우 재밌었다. 2km 정도 되는 슬로프를 내려오는데 앞뒤로 아무도 없어서 황제스키 탈수 있던 곳. 턴할 때마다 눈이 흩뿌려지는(?) 파우더 스노우의 위엄은 쩔었다. 압설 안해놓은 심설 구간은 좀 당황스럽지만 넘어져도 하나도 안아프고 폭신폭신.

스탭들 덕에 이 스키장이 더 좋아졌다. 말이 안 통해도 스키장비가 제대로 고정됐는지 직접 신겨보고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던 할아버지 스탭, 슬로프맵이랑 리프트 매치를 못해서 어버버거릴 때 눈 바닥에 글씨를 써가며 알려주던 할머니 스탭이 인상적이었다. ​



항공편이나 영어소통의 문제, jr이용객 할인 등등으로 사실 편의성은 에치고 유자와의 스키장들이 나았는데, 그럼에도 올해도 다시 가고싶다. 12월 16일 오픈이라는데 열기만 기다리는 중. 별 이유없이 마음이 답답해지는게 스키장 갈 때가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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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지를 보는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단어가 하나 있다.

“After the cathedral incident, we’ve heightened the crackdown against crimes committed by Chinese tourists,” said Kim Chang-hyun, head of a local police team in Jeju.(제주 경찰 관계자는 "성당 사건 이후에 중국 관광객의 범죄를 막기 위해 단속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On Sept. 17, Chen Guorui, a 50-year-old Chinese tourist, stabbed a Korean woman while she was praying in a cathedral in Yeon-dong. (중국인 관광객 첸궈루이(50)는 지난달 17일 제주시 연동의 한 성당에서 기도하던 여성을 흉기로 찔러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혹은 한국 신문의 영문 서비스판에서 '제주 성당 묻지마 살인사건'을 다룬 기사를 보면 이렇게 이 사건이 cathedral에서 일어났다고 쓴다.

성당=cathedral 이렇게 쓰는 모양이다.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cathedral이란 단어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성당=cathedral은 성립할 수 없다. 과거(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약간은) 가톨릭 문화권이었던 프랑스 파리에만 해도 성당이 엄청 많지만 그 중 cathédrale이 붙는 곳은 노트르담대성당과 생드니대성당 두곳이다(비슷하게 서울에도 성당은 엄청 많지만 cathedral은 명동에 하나 있다)

최근 성당에서 벌어진 사건을 찾아봐도 그렇다. 노르망디 성당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을 cathedral로 검색해보면 루앙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 얘기만 나온다.

cathedral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the principal church of diocese, with which the bishop is officially associated"라고 정의돼 있다. 즉, 주교좌 성당을 영어로 cathedral이라고 쓴다.

사건이 발생한 제주교구 연동성당은 주교좌 성당이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엔 cathedral이라고 쓰면 세세하게 따지고 들자면 오역인 것이다. 그냥 이 경우엔 church 아니면 catholic church라고 쓰면 된다. 앞서 언급한 노르망디 테러에서도 영문 기사는 church, 불문 기사는 church에 해당하는 église로 썼다.

처음 제주 사건이 터졌을 때 몇몇 매체에서 cathedral이란 단어를 써서 그냥 실수겠거니 했는데, 그 이후에도 줄곧 이 사건은 the cathedral incident로 언급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보니 성당=cathedral, 교회=church식의 단어 암기가 영향을 끼쳤지 않나 싶다.

하긴 애초 '교회'라는 단어도 기독교에만 쓰는 표현은 아니고... 생각해보니 '기독교'라는 단어 자체도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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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과 2편이 해피엔딩으로 끝났기 때문에 브리짓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줄 알았다. 눈 내리는 밤 몽블랑 매장 앞에서 키스씬, 부모님 리마인드 웨딩에서 같이 들러리를 서는 장면을 봤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어이없게도 3편의 첫장면은 다시 1편으로 돌아간듯 All by Myself가 흐르는 아파트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브리짓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빨간 잠옷도, 지저분한 집도 똑같다. 브리짓의 얼굴에서 세월이 느껴진다는 점은 다르지만.

전편에서 방송사로 직장을 옮겼던 브리짓은 직장에서도 자리를 잡으며 어느덧 40대가 됐다. 함께 밤새도록 퍼마시던 친구들은 결혼을 했거나, 파트너를 구해 아이까지 여럿 생겼고. 일에 파묻혀서(?) 지냈던 모양. 뉴스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그냥 그렇게 늙어가고 있던 중, 한꺼번에 풍파가 몰아닥친다.

록 페스티벌에서 만난 연애정보회사 CEO 잭 퀀트(패트릭 뎀시)와 사고를 치고, 친구 쥬드의 아이 세례식에선 어이없게도 전 남친 마크(콜린 퍼스)와 조우한다. 두 남자 중 한명의 아이를 임신한 상황에서, 직장에선 새파랗게 어린 상사에게 시달리게 된다. 졸지에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채, 회사에서 짤릴 위기에 놓인 것.

'응답하라'식 아빠찾기를 빼놔도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많다. 임신 초기 갈팡질팡하던 브리짓이 점차 중심을 잡고 의젓해지는 모습, 새롭게 들이닥친 젊은 상사와 브리짓을 비롯한 올드멤버들의 갈등이 진행되는 과정 등등. 원래 이 시리즈에서 브리짓은 아무 생각없는 애처럼 웃기다가도 뼈있는 소리를 해서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었으니. 브리짓이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매끄러운 구석이라곤 없고, 만신창이가 될 위기에서도 어떻게든 행복을 건져내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완벽함과 거리가 먼 그녀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냥 그녀 그대로(Just as she is).


.....여기까지는 진지한 리뷰


지난 9월 8일 홍대 롯데시네마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봤다. 올레이디즈 시사회로 진행돼, 시사회 관객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영화 보는 내내 배아파서 죽을 뻔했다. 너무 웃겨서 옆에 앉은 친구 퍽퍽 치면서 웃다가 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도 옆에서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웃고 있었다. 혼자 영화보러 가는거 좋아해도 꼭 누군가를 데려가서 봐야할 듯. 실성한 것처럼 웃게 만드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혼자 웃다가 옆사람이랑 눈 마주치면 민망할 것 같다.

웃김 포인트가 몇개 있는데 생각나는 장면만 스포없이 써보자면,


-브리짓의 직장동료이자 앵커인 미란다가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 이분은 웃기려고 나왔다.

-록 페스티벌 장면. '스타벅스 가이'를 주목해야한다.

-갑자기 국뽕을 빨 장면이 나온다. 서울시민임이 자랑스럽다.

-산부인과 의사로 나오는 '엠마 톰슨' 대사가 은근히 터진다. 이분이 심각한 말투와 표정으로 무심한듯 시크하게 툭툭 던지는게... 대본 작업에 참여했다니 원래 이렇게 웃기는 분인듯.

-남주와 서브남주의 티격태격댐이 과열될 수록 보는 사람은 즐겁다. 눈도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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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 연말. 기사 아이템 기근에 시달리던 추운 겨울이었다.

한국장기기증원의 홈페이지엔 ‘하늘나라 편지’라는 게시판이 있다. 세상을 떠나며 장기를 기증한 고인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이다. 우연히 이 공간에서 아신씨 아버지의 편지를 읽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그해 4월부터 시작됐다. 편지의 간격은 몇달 사이로 뜸해지기도 했지만, 한주에 두통이나 올라오기도 했다. 아버지들의 말투가 흔히 그렇듯 편지는 무뚝뚝하고 투박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이 너무나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글이었다.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그해 7월에서 계절을 건너뛰어 바로 11월로 이어진 아버지의 편지는 ‘너무 오랜만에 너를 찾아 미안하다’는 사과로 시작됐다. 아버지가 그 편지에 적은 새소식이 눈에 띄었다. “지난 9월 4일 네가 남긴 도서 1300여권을 정선에 있는 고등학교에 기증하고 행사를 가졌다”.

아신씨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장기기증원과 정선 여량고등학교를 통해 그에 대한 얘기를 간단히 들었다.  아신씨는 가족들에게 사랑받으며 자란 젊고, 아름답고, 똑똑하고, 착한 아가씨였다. 그런 딸을 잃고 애달픈 편지를 적어온 아버지와도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

서른네살이던 아신씨는 그해 3월 말 사고를 당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아신씨의 뇌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기계가 불어넣는 호흡과, 꺼질듯 뛰고 있는 심장만이 아신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를 미약하게나마 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통보를 받자, 거듭 고민하던 아버지는 딸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는 딸이었다. 안락사 위기에 처한 유기견을 집에 데려오고, 생전에도 종종 장기를 기증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심장이 뛰는 딸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자는 뜻에 어머니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는 하기 싫어요, 우리 딸 오늘 낮에 입원했어요”라고 오열했다. 아버지가 거듭 “아신이가 떠나면서 누군가를 살린다면 먼저 갔어도 우리와 함께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한 뒤에야 어머니는 기증서약서에 서명했다.

아신씨의 신장은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던 20대 여성에게 이식됐다. 꽃피는 봄날, 아신씨는 큰 선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신씨의 부모는 상실감을 달래기 어려웠다. 집에는 딸의 흔적이 잔인할 정도로 가득했다. 잡지사 기자이자 아마추어 작가였던 아신씨는 생전에 3000권이 넘는 책을 차곡차곡 모았다. 딸이 아끼던 책향기에 섞인 아신씨의 잔향마저 부모에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애지중지 보물처럼 여기던 책을 서가에서 끌어내렸다.

정신없이 책을 꺼내버리던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 '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한다면 하늘에 간 딸도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이왕이면 서점에 자주 못가는 산골학교를 골라 아신씨의 책을 선물하기로 했다.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근처로 자주 여행을 떠났던 아버지의 후배가 아신씨 가족에게 여량고등학교를 소개했다. 전교생이 스무명 남짓인 여량고에 책 1300여권이 우선 도착했다. 도서관 한면을 가득 채운 ‘아신문고(亞信文庫)’는 그렇게 태어났다. 아신씨 가족이 계속 책을 선물해 지금은 장서가 수천권으로 늘었다.


+++

’아신문고’ 이야기는 2014년 1월 30일자 신문에 나왔다. 기사는 내가 썼고, 당시 수습이었던 한살 아래 여자 후배가 취재를 도왔다. 후배는 강원도 정선에서, 나는 서울에서 아신씨 아버지를 만났다.

평생을 바쁘게 살면서 자수성가한 어르신이었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우리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나, 아빠를 닮아 무뚝뚝한 딸인 나나, 안 끊기고 서로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른다. 아신씨 아버지도 나와 후배를 보며 아신씨가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아신씨의 대학 후배, 후배는 아신씨 아버지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대답없는 딸에게 가끔씩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어느날 집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따뜻해지면서 아신씨가 다녀간 것을 느꼈다고도 했다. 꼬마들이 지나가면 어린 아신씨가, 여고생들이 지나가면 고등학교 시절 아신씨가, 나와 후배를 봐도 그 또래 시절 아신씨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신씨 이야기가 신문에, 방송에 나오면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기사가 나온 뒤 다시 ‘하늘나라 편지’ 게시판에서 편지를 하나하나 읽다가 아신씨 지인들이 남긴 댓글을 발견했다. 사는게 바빠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이 아신씨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제가 찾는 그 사람 송아신이 당신이 아니기를’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했는데, 가슴 아픈 소식을 오늘에서야 뒤늦게 접하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장문의 댓글에 드러난 그녀의 생전 모습은 아신씨 아버지가 추억하던, 나와 후배가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책과 강아지만큼이나 남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는 모습.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든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승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게된 짙은 후회와 슬픔이 묻어났다.

기사가 신문에 나온 뒤에 아신씨 아버지와 만난 적이 있다. 나와 후배, 아신씨 아버지, 여량고를 소개한 아버지의 후배 이렇게 넷이서 저녁을 먹었다. 그날 아버지는 방송 녹화를 마치고 온 길이라고 했다. 아신씨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신씨 아버지는 붉어진 눈을 깜빡거리며 "무뚝뚝한 경상도 아빠라 딸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나는 아신씨 아버지가 걱정됐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 아신씨 아버지는 장기기증자 유가족으로 이뤄진 합창단이 됐다. 장기기증을 알리는 홍보대사 일도 맡아, 자신처럼 가족을 떠나보낸 장기기증자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한 아버지는 술도 끊었다.

아신씨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슬픔에 잠긴 그녀 부모님에게 감히 어떤 말을 던져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이 깊었다. 슬픔, 후회, 추억, 위로…여러가지가 뒤섞인 아슬아슬한 대화가 두렵고 무거웠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신씨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남긴 것들은 그냥 남겨진 채 머물지 않고 잔잔한 변화를 불렀다. 누군가의 삶은 이승에서 떠난 이후에도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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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Minister's Questions(PMQ)

지난주 수요일 BBC와 가디언 등 영국발 기사를 읽다가 “I was the future once”란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이날 하원에서 마지막 PMQ를 마친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한말이다. 캐머런 전 총리는 2005년 그의 PMQ 데뷔에서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를 향해 “He was the future once”라고 한방 날렸던 멘트로 자신의 마지막 PMQ를 끝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의 마지막 PMQ

PMQ는 해석하자면 ‘국회 대정부 질문’에 제일 가까울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엄청 노잼일 것 같지만 구글에서 prime minister’s questions를 치면 funny가 자동완성으로 뜨는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매주 수요일 오후 영국 총리가 하원에 출석하면 PMQ가 열린다. 하원 의사당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마주보는 구조로 돼있는데, 양 사이드 앞줄엔 총리와 야당 대표를 포함 각 당의 높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뒷줄로 갈 수록 초선이나 젊은 의원들인듯. 암튼 의원들이 질문하면 총리가 일어나서 대답을 하는 방식이고 흘러가다보면 총리vs야당 대표의 구도가 된다.

특이한 건 질의 방식인데, 의원이 총리에게, 총리가 의원에게 직접 질문과 답변을 하는게 아니라 의장을 통해서 전달한다. 모든 말은 질문자나 답변자에게 직접 전달되는게 아니라 형식상 ‘Mr. Speaker’라고 의장을 부르며, 의장에게 전달하는 방식. 상대방을 저격하는 걸 피함으로써 의사 진행을 방해할 정도의 흥분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총리나 야당 대표는 dispatch box라고 부르는 상자 위에 손을 올려놓고 답변/질문을 한다.

상대편이 질문이나 답변을 하는 중간엔 살벌한 야유가 쏟아지는 일이 다반사. 자기편이 말할 땐 추임새도 넣고 환호도 한다. 대체 무슨 질문을 던질지 모르는데 어쨌거나 총리는 대부분 안 밀리고 답변을 한다. 총리와 야당 의원들 기싸움은 30분간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아무런 준비 없이 dispatch box에 서서 살벌한 공격과 야유에 꿀리지 않으려면, 일단 멘탈이 갑이어야 할 것 같고, 그 멘탈이 유지되려면 제대로 답변할 콘텐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진짜 PMQ가 대단한 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아무거나 물어봐도 다 대답하는 것'.

지난 수요일 테레사 메이 신임 총리의 첫 PMQ가 있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의 첫 질문은 이랬다.


If you’re young, you’ll find it harder than ever before to own your own home. In 1998, more than half of working households of people aged 16 to 34 were buying their own homes. Today, the figure is 25% and the Resolution Foundation suggests this will fall to 10% in the next nine years. What figure has the prime minister set herself for home ownership among young people?

그에 대한 메이 총리의 답변.

I notice the timeline that the right hon gentleman referred to. He might have forgotten that during that period we had 13 years of a Labour government, who had a very bad record in terms of house building. This is this government who is going to change that and this government that is putting more into building more homes to ensure that young people have a better opportunity to get on the housing ladder. That’s why we are a government who will govern for everyone in this country.

첫 문장에서 “젊은이들의 내집 마련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13년 동안 누가 집권했었는지는 까먹으셨나봄?”이라고 치고 나갔다. 이건 비교적 온건한 편에 속한다.

(7분 15초부터)

Has he got a reform plan for the NHS? No.
Has he got a police reform plan? No.
Has he got a plan to cut the deficit? No.
No wonder they’re going back to the former Foreign Secretary has just said this. The left is losing elections on an unprecedented scale because it has lost control of the political agenda. It’s losing key arguments and it has a deficit in ideas. That’s what he said and and he’s absolutely right.

며칠 전에 캐머런 전 총리의 PMQ 모음 영상에서 본 장면. 질문을 던진 사람이자, 여기서 말하는 he는 에드 밀리밴드 전 노동당 대표였고, the former Foreign Secretary는 밀리밴드의 형 데이비드 밀리밴드. No를 찰지게 외치는 보수당 의원들의 떼창이 일품이다.

이런 삐딱한 조롱과 깨알같은 개그와 날카로운 질의응답이 적당히 섞여있는데 꽤 재밌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축구장 같은 분위기가 날 정도. 지역구 문제 등등 너무나 그네들만의 문제가 논의될 경우엔 흥미가 마구 떨어지는데, 최근 주로 나온 떡밥은 브렉시트, 안보, 이민 등등의 문제이니 당분간은 계속 재밌을 듯하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쓰는 언어도 고급진 편이다. 몇시간씩 끄는 국회 대정부 질문과 달리, 시간은 30분 언저리로 제한돼 있다.

영국 의회의 유튜브 채널이나 팟캐스트 UK Parliament에서 들을 수 있다. 유튜브 채널의 경우엔 자막을 제공한다. 영국식 악센트에 큰 거부감이 없다면 영어공부 아이템으로도괜찮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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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Q를 보면 볼수록 어쩔 수 없이 한국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토론 혹은 대화의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실망과 아쉬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수 없다. 기자 시절에 국정감사를 현장에서 지켜볼 일이 몇번 있었다. 국회TV와 지상파 방송을 통해 중계되고, 특별한 이슈라도 있을 경우 지상파 뉴스와 신문 1면을 도배할 수도 있는 국감 현장은 정치인들이 자기 PR을 위해서 놓치지 못할 현장이기도 하다. 

국감에 출석하는 장,차관, 기관장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의 먹잇감(?)이 된다. 시선을 강탈하려는 분들은 일단 호통부터 치고 본다. 거의 반말조로 질의하거나, 목에 핏대를 올리는 분들도 자주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그 의원에 대해 있던 호감마저 다 떨어져나가곤 했다. 대개 이런 분들은 질의 내용도 허접한 경우가 많았다. 질의 내용이 날카로워야 삐딱한 조롱도 면이 서기 마련이다. PMQ가 볼만한건 볼만한 대화가 오가서지 총리와 의원들의 퍼포먼스가 죽여줘서(?)만은 아니다. 제일 눈살이 찌푸려지는 분들은 정해진 질의시간에 질문은 허접하게 하거나 아예 생략한채 자기 할말만 장황하게 하는 분들이었다. 그런 의원 대부분이 자기 말하는 내용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니, 재미도 없고 내용도 없고 알맹이도 없다.

고성이 오가는 국감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면 듣는 것만으로 힘이 쭉 빠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충실하게 국감을 준비해서 정제된 언어로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의원들을 보면 힘이 날 때도 있었다. 아직도 현역이신 I의원, 지난 총선에선 안타깝게 공천을 못받았던 M의원 등이 그랬다. 특히 I의원은 말투나 표정은 온화한데, 궁금해할만한 자료도 많이 준비해오시고 쓸데없는 퍼포먼스를 다 걷어낸 질문만 던져서 국감 집중도를 확 높인 분이었다.

의원 뿐만 아니라 피감기관 기관장들도 비교되긴 마찬가지였다. 야당에 물어뜯기면서도 기죽지 않는 PMQ를 보면 총리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해야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대부분). 기자 생활 동안 지켜본 어느 국감에서의 일이다. 장관으로 온지 석달쯤 된 장관이 국감에 출석했다. 해당 부처 국감은 마침 그해에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에 꽤 주목받는 자리였다. 여야 의원들은 작정한듯 장관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져댔고, 그중엔 별거 아닌 질문도 있었지만 굉장히 중요한 내용도 많았다. 이날 장관이 제대로 답변을 하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존경하는 의원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가 알아보고 답변 다시 드리겠습니다"는 말을 반복하거나, 장관 옆에 앉아있던, 공직생활 30년차쯤 되는 차관이 대신 답변하곤 했다. "차관 말고 장관한테 물었습니다, 장관 대답하세요"라는 호통이 쏟아졌다. 그 부처에 대한 질문뿐인데도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지역구에 대한 지엽적인 질문을 던져도 여유롭게 받아치는 PMQ와는 비교가 민망할 지경이다.

국감은 기자 시절 마지막 큰 이벤트였다. 사표를 제출하고 나오면서 동기들을 만나 '올해부터는 국감 안 봐도 된다'고 했다. 국감은 고역이라고 질색했으면서, 굳이 PMQ를 찾아보면서 드는 씁쓸함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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