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음악회: 보스트리지와 드레이트의 슈베르트III(백조의 노래)>

2019년 5월 14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이안 보스트리지(테너)
줄리어스 드레이크(피아노)

슈베르트의 연가곡 세개 중에서 한번에 완청(?)이 잘 안되는 걸 하나 뽑자면 ‘백조의 노래’다. 애초 작곡가가 빚어낸 연가곡이 아니라 그런걸까. 아무튼 오늘의 공연에서도 앞선 두 공연에서 감동했던 드라마가 느껴질지 좀 의문을 갖고 예당으로 향했다.

사흘 내내 같은 자리에서 공연을 보려고 S석 중 가장 앞줄의 정 가운데를 예매했는데, 얼마 전 모르는 번호를 전화를 받았다. 내 자리에 KBS 카메라가 설치될 예정이니, 자리를 두줄 앞으로 옮겨준다네? 표를 겟해보니 초대권이라고 뙇 찍혀있네ㅋㅋ 돈내고 샀는데!!!

사실 작년에도 보스트리지가 부르는 백조의노래의 일부를 실연으로 본 적이 있다 1번 Liebesbotschaft, 6번 In die Ferne 7번Abschied+앵콜로 4번 ständchen)설샹 실내악 시리즈 일환으로 보스트리지가 보컬, 사스키아 지오르지니가 피아노 반주자였고 그땐 슈베르트 레퍼토리가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앵콜 세레나데는 괜찮았지만, 초반에 했던 슈베르트 세곡은 힘들어보였고 뒷부분 웬록엣지가 오졌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그래서 약간 걱정 반 기대 반 하고 갔다.

사흘 동안의 공연 중 오늘이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부른 것 같았다. 지난 두 회차에서 아쉬웠던 부분(호흡이라던가 저음이라던가)이 오늘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담담할 때도, 사랑스러울 때도, 그리고 카리스마가 불을 뿜는 것 같던 순간도 있었다.

특히 13번 도플갱어는 내가 원래도 슈베르트 가곡 중 제일 좋아하는 곡인데 실연으로 들으니깐 하 정말 압도적이었다. 뻐렁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하이네스러운 가사의 8곡 아틀라스도 좋았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공기에 눌리는 강렬한 느낌이었다.

다크한 노래만 좋았던 건 아니고 어부의딸이나 봄의동경처럼 그의 미성으로 그린 듯 아름답게 불러낸 곡들은 또 그대로 영롱하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반주는 오늘도 빛났는데, 역시나 풍성한 색을 입히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드레이크 반주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공연이 안 나왔으리라고 확신한다.

‘겨울나그네’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처럼 전체가 뭉쳐 연속적인 스토리라인은 만들어낸 것은 아니나, '백조의 노래'를 이루는 곡 하나하나가 드라마였다. 마치 시리즈물과 단막극처럼 비교를 해야하나. 잠시도 흐름이 끊겨 붕 뜰 틈 따위 없었다.

원래는 뭐라고 길게 써보고 싶었는데 길게 쓸 수가 없다. 지난 사흘이 너무 좋았고 두분을 보내드리는게 몹시 아쉬우면서도 꼭 다시 보길 간절히 바라게 됐다. 한국에서 학교 다녔다면 누구나 그런 시간이 있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이 정말 힘들었는데, 그때 어쩌다 발 들여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던 곡들을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실연으로 듣는 기분은 참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앵콜도 세곡이나 해주셨다(Der Wanderer an den Mond, Im Freien, Abschied). 앵콜 사건 때문에 찰나 기분을 잡치긴 했지만, 꿈 꾸는 것 같은 기억이 강렬해 떨쳐낼 수 있었다. 드레이크가 which means goodbye라고 소개한 마지막 앵콜 abschied이 끝나고 홀을 가득채운 공기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객석이 한참 여운과 침묵을 즐길 줄 아는 모습에 살짝 감동 받았다. 안다박수맨이 있었더라도 선뜻 손뼉을 치기 어려운 그런 분위기였다. 그 공간에 있었던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하게 일렁였을 것 같다.

이안 보스트리지는 곧 심장판막수술을 앞두고 있다. 기회가 생겨서 "수술 잘 받고 쾌차해서 꼭 조만간 다시 두 분이 만드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싶다"고 말을 건넸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ps)자막은 오늘도 사소한 사고를 쳤는데 11번은 ‘봄날의 꿈’이라고 나왔는데 분명 독어로 Die Stadt라고 적어놓고 뭔 소린지... 이 순간에 주변 여러명이 프로그램북 뒤적이더라. 가사에 봄이라곤 1도 안나옴. 겨울나그네 가사 파일 수정하다 졸았나보다. 그리고 ‘날라가다’ 실화인가...

 


 

Posted by AlixJ
,

<서울국제음악회: 보스트리지와 드레이크의 슈베르트 II(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2019년 5월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이안 보스트리지(테너)
줄리어스 드레이크(피아노)



집을 나서는데 미세먼지 앱에서 ‘최악입니다’를 알려왔다. 나와서 아주 조금 걸었는데도 목이 따끔따끔한게 오늘 이안 보스트리지의 목 상태가 다 걱정되기 시작했다.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어째 지난 금요일 겨울나그네 공연보다 사람이 더 없었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유료 관객이 적으면 공연장 상태가 음..ㅠ) 헷갈렸지만, 기어이 B블럭 R석 제일 마지막 줄인 15열이 홀랑 비었다. 덕분에 16열 앉은 입장에서 시야 개꿀.

아무튼 객석 불이 꺼지고 무대 불은 켜지고, 이안 보스트리지와 줄리어스 드레이크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오늘 유난히 이렇게 느껴짐) 피아노 반주가 시작됐다.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보스트리지의 '겨울나그네'는 감정이입이 심한 공연이었다. 나그네에게 나를 투영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 담담한 프리젠테이션에도 불구하고 매우 몰입해서 감정소모가 심했던 공연인 것 같다. 오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 위 젊은 청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느낌. 다만 프리젠테이션 자체는 겨울나그네보다 훨씬 드라마적이었다. 이안 보스트리지와 그레이엄 존슨이 녹음한 1996년 하이페리온판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레코딩을 소장하고 있다. 그 레코딩에서처럼 젊은이의 청아한 음색은 아니었다. 그런 음색이 아니라는 것일뿐, 음색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에 맞게 관록이 붙어 다른 느낌의 소리가 된 것 같다. 70분 동안 모노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은 강력했다. 사랑을 찾은 젊은이의 설렘-불안-질투-절망과 체념으로 이어지는 감정을 사랑스럽게 노래하기도, 아프게 토해내기도 했다. 이 점은 오히려 레코딩보다 훨씬 좋았다. 라이브 공연이라 당연한 건가?

각 부분별로 보자면... 2번곡 'Wohin'까지는 사실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난 번 공연 때도 저음이 힘들어보인다고 느꼈는데, 떨어지는 저음이 잘 안 나와서 내가 다 불안해진 부분이 분명 있었다. 분명 소리가 작아야 할 부분이 아닌데 소리가 쪼그라들었다. 목이 덜 풀린 건가.

그러나 2곡을 넘어가면서부터 제자리를 되찾았다. 제일 좋았던 곡들은 7번 초조(Ungeduld), 16번 사랑하는 빛깔(Die liebe Farbe) 17번 싫어하는 빛깔(Die bose Farbe). 7번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피아노 반주로 들리는데, 참 사랑스럽다. 콩콩거리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외치는 Dein ist mein herz가 참 절절하다. 아마 이 부분에서 두근거렸던 각자의 추억들을 떠올렸던 사람들이 있을지도?

연속되는 16번과 17번은 대조를 이룬다. 그녀가 좋아하는 색이니 초록색 풀 밑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 초록색과의 단절, 그녀와의 이별을 고하는데 참 마음이 아픈 대목이었다(잡설이지만 17번에서 안녕이란 표현은 Ade로 쓰였는데,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인사인 불어의 adieu에 해당하는 표현 같다). 여기서 보스트리지의 보컬이 클라이막스였는데, 젊은 시절처럼 청아하게 올라가는 대목들이 있었다. 격앙되는 패시지에서 슬픔이 참 절절하게 묻어나는 표현력이 좋았다.

다만, 그 대목 바로 전인 14번(사냥꾼)이나 15번(질투와 자랑)에선 도사리는 불안을 노래할 묵직한 저음이 아쉬웠다. 앞에서도 잠시 느꼈지만 저음부는 음색이 달라지면서 아예 성량이 차이가 났다. 연기로 커버가 되나, 긴장이 팍 고조되진 않았음. 그 점이 오늘 공연의 음악적 면에서 아쉬운 면이었다. 그러나 연기로 커버가 되기 때문에 또 아주 별로라곤 못하겠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곡. 19곡까지 화자가 젊은이였다면(19곡은 시냇물과의 대화형식) 20곡의 화자는 시냇물. 이전까지 고조되어 있던 무대 위 분위기가 담담해지면서, 서글프면서도 포근한 위로가 공간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Gute nacht Shlaf aus deine Freude, schlaf aus dein Leidl'이란 가사가 참 담백하게 전달되었는데, 평안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얻게 되는 마지막이 참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겨울나그네 때보다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좋아보였다(오늘은 물도 안 마시더라).

보스트리지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레코딩은 그레이엄 존슨, 미츠코 우치다 둘과 했던걸로 아는데,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반주는 역시 오랜 파트너 답게 훌륭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리트에서 반주자는 거의 대등한 파트너인 것 같다. 가수의 노래가 언어적인 표현이라면, 반주자는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회화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오늘 드레이크의 훌륭한 반주 덕에 마치 노랫속 장면을 그리듯 상상해볼 수 있었다. 반주자와 관련해 한가지 또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곡과 사이사이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몇개 파트로 줄거리가 나눠지는데(젊은이가 물방앗간에 와서-아가씨와 썸을 타며 사랑에 빠지고-사냥꾼이 나타나서 불안불안-결국 낙담하고 자살로 대충?), 파트가 분할되는 경계에선 휙 거침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 같은데, 큰 덩어리 안에서 곡과 곡 사이 여운을 통해 다음 곡으로 연결되는 타이밍엔 숨죽여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는 게 눈에 띄었다.


오늘도 대부분 기립했고, 그럴만했다. 오늘 컨디션이 지난 금요일보다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앵콜곡 또한 오늘 공연의 일부였는지 앵콜이 있었다. 브리튼이 편곡한 버전의 O Waly Waly. Karla Bonoff의 'The Water is Wide'로도 많이 알려진 곡이다. 물과 이별의 이미지가 아주 선명한 곡이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에서 이어지는 앵콜 곡으로 괜찮은 선곡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뜬금없이 의식의 흐름을 거쳐 공무도하가도 생각나네ㅋㅋ

http://www.bbc.co.uk/music/tracks/n4j6b5


겨울나그네 공연 끝나고 나선, 나그네의 이야기에 과몰입한 여운에서 헤어나려 몸부림쳤다면 오늘은 아주 슬픈 영화 하나를 보고 나온 것 같다. 여러모로 이 곡의 명반으로 일컬어지는 레코딩을 남긴 음악가다운 공연이었다. 보스트리지 나이 서른 살 때 녹음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이 곡의 화자 젊은이다운, 그 나이에 어울리는 레코딩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반대로 50대 중반에도 무대에서 청년으로 변신할 수 있는 그 저력도 대단할 따름이다.

지난 공연 최악의 옥에티였던 자막 스크린은 좀 개선됐다. 번역이 별로인건 어쩔수 없었겠지만, 최소한 싱크로는 맞추려는 노력은 한 것 같다. 다만 센스있는 공연장이라면 독일어 원어와 함께 띄울 듯(예전 서울시향 합창 공연 땐 그러했는데)하다.

공연이 좋아서 관크 얘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그래도 빡침의 기억 또한 강렬해서 써야겠다. 내 자리가 16열이었는데 15열이 거의 비어서 시야가 시원한 터라 땡잡은줄 알았으나, 15열 왼쪽 사이드 여자가 늦게들어옴+핸드폰인지 뭔가 묵직한가 떨어뜨림+책자 부시럭 쓰리콤보 달성했다. 이걸 한 인간이 저질렀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더한 진상은 따로 있었다. 17열인사 16열인가 오른쪽에 앉은 노년 남성은 수차례 고의적 기침에 이어 “칵-“(가래 뱉기 전 단계)를 시전했다. 뱉진 않았으니 도로 삼켰나보다. 그 주변이 그로 인해 매우 방해 받은 듯했는데, 또 누가 제지하느리 말을 걸었는지 말소리도 들림ㅋㅋㅋ 개막장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지난 겨울나그네 때와 달리 브라보 아재나 안다박수가 터져나오지 않았다. 'Und der Himmel da droben, wie ist er so weit!'라는 여운이 허공을 충분히 채운 후 반주자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린 후에야 박수가 터져나왔다. 안다박수 없는 공연이 오랜만이라 이 점은 참 좋았다.

아무튼 겨울나그네를 듣고 나서 참 심경이 복잡했다면, 오늘은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들으면서 올라온 약간의 흥분이 착 가라앉으며 공연장을 나왔다. 이 상태로 또 머리식힐 겸 남부터미널까지 걸어갔는데 와 미세먼지 오지네. 보스트리지가 이 미친 미세먼지에 영향 받지 않은 쌩쌩한 상태로 화요일 공연을 들려줬으면 좋겠다.

 

TMI) 보스트리지가 쓴 '겨울나그네(Winter Journey: Anatomy of an obsession)'을 펼치면 첫장에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에게 바친다'라고 써 있다. 그가 기혼인 점을 감안해, 아마도 아내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생각해보니 그의 아내의 이름이 루카스타 밀러(Miller). 독일어로 Müller(남성형), Müllerin(여성형)에 해당한다. 보스트리지에게 Die schöne Müllerin은 실존인물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Geselle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걸까.   

Posted by AlixJ
,

<서울국제음악회: 보스트리지와 드레이크의 슈베르트 I(겨울나그네)>

 

2019년 5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Ian Bostridge(테너)
Julius Drake(피아노)



예전에 쓴 보스트리지 공연 리뷰에도 언급했듯 고등학교 시절에 리트를 참 많이 들었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의 레퍼런스(사실 겨울나그네 뿐 아니라 많은 리트들의 레퍼런스인) 피셔-디스카우로 입문해서 한스 호터, 페터 슈라이어, 프리츠 분덜리히 등 이미 옛날 사람의 반열에 속하는 분들로 시작해 동시대 성악가들의 리트 음반을 찾아 듣기에 이르렀는게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게 이안 보스트리지였다.

겨울나그네를 처음 들었을 땐 참 우울이 곳곳에 깊게 침투한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사를 곱씹으며 재차 들어보면 24개의 곡에 우울, 흥분, 기쁨, 분노, 허무 같은 다양한 감정이 골고루 오간다. 특히 보스트리지의 표현력이 좋기 때문에 마음을 찢어놓고 옅은 희열과 격앙된 흥분과 그런 감정선이 참 잘 전달됐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무대 위의 가수와 피아니스트만 하겠느냐만은, 깊게 몰입했다가 공연이 끝나니 뭔가 감정 소모로 인한 기빨리는 기분이 좀 들기도 했다.

공연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자면 오늘 보스트리지나 반주자인 드레이크의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그래서인지 공연도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사스키아 지오르지니와 함께 했던 ‘멀리있는 연인에게’ 공연 때는 반주가 좀 아쉬운 면이 있었다. 역시 오랜 파트너인 드레이크와의 공연이어서 그런가 찰떡 같았다. 리트 공연에서 반주자가 조연이 되느냐, 거의 대등한 파트너가 되느냐에 따라 그날 공연의 호연 여부가 많이 좌우되는 것 같은데 오늘은 확실히 후자였다.

리트 가수로서 보스트리지를 탐탁치 않게 평가하는 의견으로 네이티브가 아닌 독일어 딕션을 드는 사람도 좀 본 것 같다. 리트는 가사 전달이 중요한 장르이고, 확실히 초기 음반에서 독어 딕션이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점차 개선되어 그런지 독일어 딕션이 크게 거슬린다는 점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저음으로 뚝 떨어질 때 잘 안 나오는 저음이 약간 아쉽긴 했다.

피셔-디스카우의 영향 때문인지 겨울나그네는 바리톤의 곡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뭔가 이 곡이 주는 쓸쓸하고 어두운 인상이 바리톤에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보스트리지는 본인 저서인 ‘겨울나그네’에서 본래 슈베르트가 이 연가곡을 작곡했을 때 테너의 테시투라로 출판됐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공연을 보고 나니 그의 자신감도 이해가 되고, 이 곡이 바리톤의 곡이라는 인상도 한층 걷어냈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감정의 깊은 곳까지 후벼파는 표현력이 일품이었다. 24곡까지 다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게 됐다(갑분 박수 ㅅㅂ). 그만큼 잔상이 오래 남고, 감정이입도 되고, 공연을 본 입장에서도 감정 소모가 좀 있는 공연이었다. 보컬과 피아노 만으로 이렇게 차원이동시키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음악 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좀 있었다. 다른 성악곡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에 곡을 붙인 리트는 가사 전달이 매우 중요한 장르다. 모두가 독일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패시지에서 무슨 소리 하는진 알아들어야 제대로 이해되는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띄워놓은 스크린에 수동으로 가사 넘긴 인간은 정말 아마추어였다. 공연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헤매는게 이 공연의 대단한 옥의 티 중 하나였다. 12곡 고독과 13곡 우편마차 사이에선 아예 다른 곡을 띄워놓고 우왕좌왕 스크린 넘기길 반복했다. 부디 남은 공연들에선 이딴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트는 대체로 ‘조용한’ 음악이다. 사이사이 쉬는 구간의 호흡도 그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가수나 청중이나 호흡을 고르는? 따라서 이 부분에서 기침을 도저히 못 참고 폐병 걸린거마냥 기침이 복받친다면 그냥 리트 공연은 안 오는게 낫다고 본다. 그 외에도 (매니악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관크가 제법 있었다. 핸드폰 소리도 어디선가 들렸다. 중간 입장하는 아지매들은 무슨 패기인지 모르겠다. 예당도 이런건 엄격히 제지해야 프로다운 자세일 것이다.



아, 공연 끝나고 기립하는 분위기였다. 기립할만한 공연이었음. 사람들이 앵콜 기대했을 수도 있으나 앵콜은 없다. 연가곡이 끝났을 때의 여운과 분위기가 앵콜을 함으로써 단절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앵콜이 없는게 나쁘지 않았다. 보스트리지의 목소리를 더 듣고싶긴 했지만...

남은 2회의 공연도 너무너무 몹시 기대된다. 혹 리트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가길. 슈베르트 연가곡을 현존하는 이 분야 최고 수준의 조합으로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공연 끝나고 감정 삭이고 현실 복귀하기 위해 남부터미널까지 어두운 길을 따라 걸어갔다. 밤공기가 참 좋았다.

Posted by AlixJ
,

<공연 전날 R석 티켓 한장 취소해 준 분께 감사드리며>

6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의 공연에 다녀왔다. 10-11일 공연은 알았는데 이 공연의 존재는 너무 늦게 알았고, 존재를 알았을 땐 이미 IBK체임버홀 좌석은 모조리 매진된 후라 마침 개강도 했고 하니 곱게 마음을 접으려고 했었다.
공연 전날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밤중에 예당 홈피에 들어갔더니 R석 가운데 블록 13열에 괜찮은 좌석이 딱 한장 비어있었다. 바로 겟.

사실 이안 보스트리지를 한창 좋아하던 것은 한참 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초반까지 독일 가곡을 아주 열심히 들을 때가 있었는데, 이안 보스트리지가 부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가 명반이라는 추천을 받고 앨범을 무려 아마존에서 사서 들어본 뒤부터 좋아하게 되었다. ‘물방앗간’이나 ‘시인의 사랑’ 같은 서정적인 레퍼토리가 대표적으로 좋지만, Der Zwerg나 마왕 같은 무시무시한 곡도 소름끼치게 소화해서 후자 쪽을 더 좋아한다. 리트를 부르는 테너 중에선 분덜리히 다음으로 많이 들은 듯.



어쨌든 그렇게 갑자기 공연에 가게 되어 별 준비 없이 공연장에 갔다. 레퍼토리는 슈베르트 연가곡 ‘Schwanengesang(백조의 노래) 중 세곡, 베토벤의 연가곡 An die Ferne Geliebte(멀리있는 연인에게), 슈베르트 가곡 Auf dem Strom, 말러의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본 윌리엄스의 On Wenlock Edge(웬로크 벼랑에서). Auf dem Strom은 피아노-호른 편성으로, 말러는 하프와 관악이 들어간 실내악 편성으로, 본 윌리엄스는 현악과 피아노 반주로 불렀다.

사실 처음 슈베르트 세 곡은 무난했지만 컨디션이 안 좋아보여서 기대보다는 살짝 실망이었다. 그러나 곧 시작된 베토벤의 An die ferne Geliebte는 정말 좋았다. 뒤로 갈수록 가수 컨디션이 점점 좋아져서 그런가 특히 5,6번째 곡은 애달프면서 담담한 곡을 표현하는데, 순간 가슴이 찌릿 아플 정도로 좋았다.

방황하는젊은이의노래는 실내악 버전의 반주가 낯설어서 처음엔 뭥미 싶었는데 듣다보니 꽤 좋았다. 웬로크는 이날 쌩처음 듣는 곡이었는데도 울컥하게 만드는게 있었다. 게다가 가사가 영어라 상대적으로 독어권 성악가에 비해 약점인 보스트리지의 리트 딕션이 완전이 극복된 곡이었다. 그의 모국어로 부르는 노래는 확실히 더 울림이 있었다. 곡이 끝나고 한참동안 먹먹해서 홀린듯 앉아있었다. 앨범도 주문했으니 다시 들어봐야지.

전체적으로 보스트리지는 상실감과 애달픈 청년 시점을 표현하는덴 특화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황으로 듣다보니 울컥하는 순간이 몇번 있었다.

앵콜 때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중 Standchen(세레나데)를 불러줬다. 흔한 앵콜이지만 좋았다. 내심 앵콜로 보스트리지가 무시무시하게 부르는 der zwerg나 마왕 기대했는데 앵콜로 하기엔 빡신 곡이긴 하다(특히 반주). 하이라이트 komm beglücke mich에서 어디선가 카톡 소리 울린 건 조금 깼다ㅠ

끝나고 주차장 쪽에서 어슬렁거리다 보스트리지와 마주쳤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 깐깐한 교수님 풍의 쿨내가 풀풀 풍겼는데 오랜 팬이었다고 싸인 부탁하니 냉기를 풀풀 날리며 쿨하게 해줬다. 약간 울적하면서도 묘하게 황홀하기도 한 밤이었다.

Posted by Alix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