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쓴 아키타 3박 4일 여행기

#1 센다이, 하뉴 유즈루
출국일은 마침 평창올림픽이 폐막하는 날이었다. 인천공항 곳곳에서 선수단 추리닝을 입은 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올림픽의 여운을 찐하게 느낀 곳은 비행기가 내린 일본 센다이에서부터였다.

체감상(?),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도 일본 최고의 동계올림픽 스타는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무려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가 된 하뉴 유즈루인 것 같다. 피겨스케이팅에 PCS라는 점수구성이 들어가는 마당에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일지라도 여러 번 재활용하면서도 pcs를 잘 받는 하뉴 유즈루를 좋아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올림픽 2연패는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이 하뉴 유즈루가 태어난 곳이 바로 도호쿠 지방의 중심 도시 센다이다. 일본 피겨 스케이팅 선수 중에선 유난히 나고야나 간사이 지방 출신이 많다. 이토 미도리,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 스즈키 아키코 그리고 이번 올림픽 남자 싱글 동메달리스트인 우노 쇼마는 나고야 혹은 그 인근 지방 출신이다. 미야하라 사토코, 사카모토 카오리, 다카하시 다이스케, 그리고 요즈음 뜨는 혼다 마린까지 간사이(오사카, 고베, 교토) 출신이다. 아마도 이 지역에 여러 기업들이 몰려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일본 다른 지역보다 생활 수준이 높아서 빙상 인프라도 괜찮고, 피겨스케이트처럼 돈 많이 드는 서포트해줄 형편이 되거나 후원을 얻기가 용이한 점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하뉴는 다른 일본의 유명 피겨선수들과 달리 센다이 출신인데 아무리 도호쿠 지방 최대의 도시여도 센다이는 인구 규모로 보나, 산업으로 보나 나고야나 한신 지역에 비해선 좀 많이 약하다. 그 와중에 2011년 3/11 대지진의 직격탄까지 맞았다. 이날 실제로 하뉴는 아이스링크에서 연습을 하다가 지진을 맞아 급히 대피했었다고도 하는데. '상대적으로' 빙상 인프라가 약한 지역에서, 그것도 대지진이라는 크나큰 역경을 맞기도 했으나 올림픽 2연패를 했다는, 어쩌면 만화적이기까지 한 스토리는 과연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 만하다.

센다이 공항 입국장에는 하뉴 유즈루의 대형 사진과 사인이 걸려있는 벽이 있다. 바로 옆 기둥엔 2011년 대지진 당시 초토화됐던 이 공항에 어느 정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지 표시해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그 앞 벤치에 잠깐 앉아있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하뉴의 사진 앞에 멈춰섰고,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사진을 찍었다. 나도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하뉴의 사진과 기둥이 모두 한 프레임에 담겼다. 나름 열도를 들었다 놓은 스토리가 압축된 한 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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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료칸
일본을 여행할 때 가급적 료칸에 묵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늘 료칸에 묵었던 것은 아니다. '1인당' 매기는 비용이 꽤 부담스럽기 때문에, 료칸을 고를 때 따지는 조건에 맞지 않으면 그냥 차라리 가격이 더 저렴한 호텔로 간 적도 많다. 조건을 세세하게 늘어놓자면 길어지지만 대충 다음과 같다.

-온천, 그것도 노천탕이 있어야 한다; 료칸에 가는 첫번째 이유가 온천이다. 사실 온천의 수질까지 자세히 따지고 들 정도의 온천 매니아는 아니지만, 온천의 성분보다 더 중요한 건 노천탕의 유무다. 특히나 겨울에 료칸에 묵는 이유는 몸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워지는 노천탕을 즐기기 위함이므로, 노천탕이 없는 온천은 일단 거른다. 기왕이면 온천에 인공미가 잔뜩 가미된 것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솟아나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온천이 좋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굳이 불편을 감수하며 버스가 몇시간에 한대씩 다니는 험한 오지에 있는 온천에 찾아가는 이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토의 료칸은 그 어마어마한 가격에 비해선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천년고도답게 지진이 그나마 드문 곳이라 그런가 자연 온천이 딸린 료칸이 교토 시내에는 없고, 아라시야마에나 가야 노천탕 딸린 료칸이 있는데 이 온천이 진짜 땅을 파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오는 지하수를 데운 건지 알 방법이 없다(아라시야마에 있는 호시노야 교토에 온천이 없는 걸 보면 의심이 더 짙어진다).

-기왕이면 건물이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곳이 좋다. 이건 정말 그냥 느낌적인 느낌 때문인데, 왠지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에 자리한 료칸은 정이 안 간다. 에치고유자와랑 노보리베츠에서 깔끔한 새 건물에 위치한 료칸에 묵은 적이 있는데 깔끔한 시설이 좋긴 했지만, 료칸의 운치는 느낄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제일 만족스러웠던 곳은 게로온천의 유노시마칸. 문화재로 지정된 본관은 불편하지만 삐걱대는 나무 바닥과 오래된 다다미 냄새와 건물을 채우고 있는 낡은 소품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식사도 료칸을 고르는데 중요한 요소다. 료칸 홈페이지마다 자기네 료칸에서 어떤 음식을 낼지 써놓은 곳이 많은데, 대충 이걸 보고 음식 스타일이 맞거나 맞지 않는 곳을 고를 수 있다. 로컬푸드를 사용하는 료칸을 우선적으로 고른다. 단, 홈페이지로 보면 다 눈으로 보기에 감격스러울만큼 예쁜 음식 사진만 나오기 때문에 제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적나라한 후기는 트립어드바이저나 구글맵에 나오는 일본인들의 리뷰를 번역기를 통해 참고했다. 인근 지역에서 난 제철 재료를 사용하되, 잘 먹지 않는 몇몇 식재료를 메인 재료로 내는 곳은 거르고, 또 눈으로 보기에만 예쁘고 쓰잘데기 없이 가짓수 채우는 가이세키를 내는 곳은 후기를 통해 거르다보면 대충 몇몇 곳이 추려진다. 아주 향토색 강한 음식을 내는 아키타의 츠루노유 온천 별관 '야마노야도'는 그런 면에서 음식이 아주 훌륭한 료칸이다.

이번 여행에선 3박4일 동안 두곳의 숙소에 묵었다. 원래는 예전에 묵어봤던 야마노야도에서 3박을 머무를 계획이었으나, 워낙 예약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 끝 1박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자와코 지역 숙소를 쟈란넷에서 찾아 구글와 트립어드바이저 리뷰들을 참고하다보니 '고마가타케 온천'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건물도 고택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히 오래돼 보였고, 음식도 아주 지역색 강하면서 실속있게 나오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온천이 끝내주는 곳 같았다. 특히 강물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전세 노천탕이 매우 기대되는 곳이었다. 여기도 화실은 방을 못 잡아서 침대가 있는 양실을 예약했다.

결과적으론 아주 좋았다. 숙소는 적당히 오래된 건물을 깔끔하게 관리해서 아주 운치 있었고, 음식은 가짓수가 많진 않았지만 아키타 지방에서 나는 재료들을 사용한 특색 있는 요리를 즐길 수 있었다. 기대했던 온천은 기대 이상이었는데, 강변 전세 노천탕 두곳 외에도 실내 대욕장과 공용 노천탕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온천물도 좋았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겨울 하늘 아래, 하얀 눈이 둘러싸고 있는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마시는 캔맥주는 꿀맛이다. 가격은 1박 1인 2식 포함해 11500엔. 16000엔인 야마노야도도 저렴하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싸다. 나중에 알고보니 고마가타케 온천은 경영난을 겪었던 곳을 츠루노유 온천 주인이 인수해 운영하는 곳이었다. 역시 츠루노유 온천을 운영하는 내공답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만큼 값진 명소로 만든 것 같다. 주인이 같은 곳이다보니 저녁 먹은 이후에 츠루노유 본관 온천까지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3 과자점
다자와코 근처 사무라이 고택이 모여있는 가쿠노다테에 가기 위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떴다. 구글맵을 켜고 역 근처를 살펴보다가, 지도상에 있는 과자점이 눈에 띄였다. 지도상으론 역에서 도보로 2-3분쯤 걸리는 곳인데 제설 작업이 한창이라 피해 돌아가는 바람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간판도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쳤을 조그만 과자점이었다.
'과자점'이라는 이름 답게, 식사빵류는 팔지 않고 양과자와 화과자만 판다. 양과자 종류는 그날 쇼케이스에 있던 것은 다쿠와즈와 쿠키들, 딸기 쇼트케이크, 초콜릿케이크 그리고 무려 몽블랑. 화과자는 딸기가 들어간 모찌와 도라야끼, 만주가 있었다. 막 나와서 포장되고 있던 다쿠와즈와 도라야끼, 만주, 레이즌 쿠키를 한두개씩 샀더니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던 주인 할머니가 서비스라며 딸기 들어간 찹쌀떡을 봉투에 하나 더 넣어줬다. 역으로 돌아와 쿠키와 다쿠와즈를 한입씩 베어 물었는데 깜짝 놀랐다. 조금만 버스 타고 달리면 휴대폰 신호가 끊어지는 이런 깡시골 구석의 과자점에서 파는 과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만큼 맛있었다. 동네 분위기랑 잘 안 어울리긴 하는데 모카크림이 들어간 다쿠와즈가 특히 맛있었는데, 겉은 적당히 바삭하고 쫀득했고 속에 들어간 크림은 느끼하거나 무겁지 않고 고소하고 신선한 맛이었다. 여행 중 이런 의외의 발견은 신기하면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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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3-팔레르모&체팔루>

팔라티나 예배당을 나와 호텔에서 짐을 찾았다. 택시를 타고 팔레르모 항구로 갔다. 항구 근처로 가니 덩치 큰 차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혹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짐을 싣고 오가는 화물 트럭들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4차선 정도 되는 신호등 없는 도로를 건너 AVIS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보통 험난한게 아니었다. 이 자그마한 길에서 시칠리아인의 운전 습성을 제대로 체험했다. 크락션과 하이빔과 무깜빡이 끼어들기 등등… 그나마 다행인건 일단 사람이 들이대면 차가 서긴 선다. 뭐라고 욕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못 알아들으니 노상관.

AVIS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차를 픽업하러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선 아까 그 길을 다시 건너야했다. 그래도 두번째 건너는 길이라고 좀 더 대범하게 발걸음을 내딛었으나, 그래도 쫄긴 쫄았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엔진 소리와 클락션 소리가 뒤섞인 항구의 도로는 어지러웠다. 사무실 직원이 차량 픽업 장소를 알려줬는데, 한번에 못 찾아가고 빙빙 돌면서 헤맸다. 사무실에 다시 찾아가서 물어봤는데도, 못찾아서 항구에서 일하는 아재들한테 길을 물었다. 어차피 단어가 많이 들어갈 수록 못 알아들을 가능성은 높아지니깐, “where is AVIS” “Dove AVIS” 딱 이렇게만 외쳤다. 아 그전에 “Parli inglese?”를 물어보긴했다.

문제는 영어를 못하는 아재들도 흔쾌히 “Si!!”를 외치셨다는 것. 아재는 엄청 빠른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나는 영어로 더듬거리고… 의사소통이 될리가 없다. 손짓발짓으로 왼쪽 오른쪽 느낌적인 느낌을 이해하는 중에 아재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지나가는 다른 아저씨를 불렀다. 이 아저씨는 ‘잉글레제’가 좀 된다는 것 같았다. 잉글레제가 좀 되는 그 아저씨는 그래도 손짓발짓 시니스트라 데스트라 대신 레프트 라이트라고 말이 통하는 분이라 그 덕인지 한참만에 AVIS 간판을 발견하고 차를 찾았다.시칠리아의 좁은 길에 딱이라는 도요타 야리스를 몰고 팔레르모 시내를 빠져나갔다. 아까 건너면서 기겁했던 그 4차선 도로를 빠져나가는게 좀 헬이었던걸 빼곤, 모든게 무난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구글을 찬양하게 됐는데, 그 계기가 바로 길치 둘을 구원해준 구글네비님이시다. 유럽 렌트카 여행 다녀온 사람마다 구글네비 타령을 하길래 대체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네비를 켜자마자 아이나비 따위보다 훨씬 정확한 도로정보를 ‘한국말’로 알려줬다. 아무튼 구글네비를 따라 거의 안 헤매고(구글네비 달고도 헤맨 적은 있는데 대부분 구글네비가 2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는데 멍때리다가 지나친 것). 아,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이탈리아 차에는 선팅이 된 차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강렬한 직사광선이 내리쬘 땐 얼굴과 상반신이 함께 이글이글탄다. 좋은 점(?)도 있는데 룸미러로 뒷차 운전자 표정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눈치를 주면 알아듣기 쉽다는 말이다. 어쩌다 옆차랑 시비가 붙으면 문을 내리고 어차피 운전자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욕을 하는 대신, 안면근육을 놀려 빡침을 표현할 수 있다.

▲시칠리아 도로를 달리다가

팔레르모 도심을 벗어나자 평화로운 시골 벌판 사이로 쭉 뻗은 도로가 나타났다. 체팔루로 가기 위해선 시칠리아 북서쪽 해안도로를 거쳐야했다. 오른쪽으로 새파란 코발트 블루의 바다가 보이는 길을 한시간 정도 달려 Cefalù라는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산에 만든 성벽 아래로 빨간 지붕 건물과 우뚝 솟은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이정표를 읽지 않아도 그곳이 체팔루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체팔루는 산이라고 하기엔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엔 높은 작은 산등성이에 자리한 마을이다.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는데 해안선은 산쪽으로 움푹 들어간 U자 모양이다. 그 해안선에서 시작된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산 위에 남아있는 로까(rocca 요새) 입구까지 닿는다. 급경사가 시작되는 어귀에 기차역이 있었다. 구도심 한가운데는 이탈리아 운전할 때 최고 짜증나는 ZTL 적용구역이었으므로, 아예 접근할 생각을 접고 기차역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해안가와 로까를 잇는 길. 체팔루. Cefalù

해안가로 내려갔다. 마을이 감싸 안은 해안선에는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랬고, 바다는 그보다 더 새파랬다. 아주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바닷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장면을 머릿속에 재생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었던 1980년대나 지금이나 체팔루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들쑥날쑥한 네모 건물들이 영화에서보다 아주 조금 더 낡아보일 뿐이었다. 비수기라 조용한 해변엔 간식을 들고 소풍을 나온 동네사람들만 삼삼오오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해변. 여기 어디에선가 '시네마 천국'을 촬영했다. 어차피 물에 안들어가는 사람에겐 비수기 바닷가가 훨씬 좋다. 체팔루. Cefalù

해안가에서 시작된 골목으로 들어가자, 노랗고 네모난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레스토랑을 찾아봤는데 5위권 안쪽에 들어가 있는 집들은 비수기라 그런가 문을 닫았거나, 동선을 고려했을 때 찾아가기에 영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다. ‘1등 아니면 싫다’던 박 기자도 배가 고팠는지 조용해졌다. 할 수 없이(…) 무려 트립어드바이저 6등에 오른 ‘Locanda del Marinaio’에 가기로 했다. 와인저장고처럼 둥근 천장의 레스토랑이었다. 배가 너무 고프던 차라 메뉴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해산물파스타와 대구살라비올리를 주문했다.


▲Locanda del Marinaio의 파스타들. 둘다 맛있었지만, 특히나 해산물 파스타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재료로 대단한 맛을 냈다.

이 집은 식전빵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겉은 거칠고 속은 보들보들한 빵이었는데 향이 진한 올리브유에 찍어먹는게 어찌나 맛있던지… 원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면 식전빵 잘 안먹는데 순식간에 빵 한접시가 뚝딱 없어졌다. 조금 기다리다보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해산물 파스타는 인생파스타였다. 이렇게 평범한 메뉴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다. 딱히 뭐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은 오일베이스 파스타였는데, 신선한 재료를 도대체 어떻게 익힌건지 연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최고였다. 면에도 해산물의 맛이 깊게 배어 밀가루 면만 씹어도 심심하지 않았고, 생면을 딱 적당한 정도로 쫄깃하게 익었다. 한접시가 사라지는게 아까울 정도로 최고의 파스타였다. 다음에 시칠리아에 간다면 이 파스타를 다시 먹기 위해 체팔루를 갈 용의가 있다.

박기자가 시킨 대구살 라비올리도 한국에서 못본 음식인데, 해산물 파스타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지만, 신선한 재료를 솜씨좋게 요리한 디쉬였다. 꽉 채운 대구살이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탱글거려서 조금 놀랐고, 라비올리피도 딱 적당히 익어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체팔루 거리를 걸었다. 두오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서있는 팻말을 읽지 않아도, 가장 우뚝 솟은 종탑을 찾으면 되니깐. 하긴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에서 ‘모든 길은 두오모로 통한다’.

체팔루 두오모는 이제 조금 봤다고 익숙해진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규모는 몬레알레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것 같지만(몬레알레를 안갔으니) 내부 모자이크가 팔라티나 예배당이나 몬레알레 대성당과 비슷한 스타일로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음… 근데 성당이 닫혀있었다.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데 아그리젠토로 가야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할 수 없이 두오모 광장의 조그마한 젤라또집에서 젤라또를 사들고 먹으면서 두오모 외관이나 감상하기로 했다.

▲조그맣지만 포스는 작지 않았던 체팔루의 두오모. Duomo di Cefalù

겨울 유럽여행의 안좋은 점이, 길에서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 먹기 어렵다는 점이다. 4년 전 파리에서 베르티용 아이스크림 테이크아웃해서 먹으려다가 이가 시려 죽을 뻔했었다. 2월에 벚꽃이 만개하는 시칠리아에서는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피스타치오, 초콜릿 같은 평범한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고터 파미에스테이션에 있는 ‘젤라X젤X띠’라는 젤라또집을 굉장히 좋아하는데도 하나에 4000원이 넘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자주 못가고 있다. 진한 피스타치오맛, 초콜릿맛 아이스크림이 두가지맛에 2유로도 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양은 훨씬 더 많다. 본토의 위엄이라고 넘기기엔 한국에서 젤라또 사먹으면 손해보는 느낌을 넘어 눈탱이 맞는 느낌인걸 지울 수 없다.

막상 팔라티나 예배당에서는 내부 모자이크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외관을 볼 정신은 없었던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핥아먹으며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두오모를 눈에 담았다. 이탈리아를 여러번 왔지만 각 도시를 대표하는 두오모는 제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외관이 색다른 시칠리아의 두오모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양파모양 창문, 늘어선 기둥과 아치, 미나레트를 닮은 종탑. 이렇게 생긴 건물들이 서서히 눈에 익어갈 때쯤 아그리젠토로 떠났다. 체팔루에서 아그리젠토까지는 차로 두시간 반 남짓 걸리는 거리. 그러나 마치 다른 나라에 간듯 또 완전히 다른 첫인상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마도 바오밥 나무일 것이라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가로수로 바오밥나무라니! 아그리젠토 가는 길

▲'신들의 도시' 아그리젠토로 가는 길. 펼쳐지던 벌판에서 갑자기 신전이 튀어나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계속>



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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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2- 서울&팔레르모>

결혼식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가버렸다.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던 것 같고, 하도 웃는 표정을 고정시킨채 사진을 찍느라 나중엔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던 것 같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았을뿐이다.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식이 끝나고 프레스센터 로비에 내려온 직후부터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이 이미 프레스센터 앞을 가득 채우다 넘쳐 프레스센터 로비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채 한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직원들이 뚫어준 길을 사수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차창 밖 풍경은 기괴했고 약간은 무서웠다. 다시 한번, 이 혼란을 뚫고 결혼식에 와 주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드린다. 신행 가는 비행기가 다음날 오후라 여유있게 머리도 손질하고 친정집에 놔둔 캐리어까지 들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플라자호텔로 왔다. 호텔에 짐을 풀고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날뿐 아니라 드레스에 육신을 맞추기 위해 두달동안 저녁을 먹지 않은 고행을 겪은지라 허기에 시달리기가 일상이었던 나날이었다. 봉인이 풀렸다는 생각에 두달치 허기가 한꺼번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지만 맵고 짠게 몹시 그리웠다. 피부가 뒤집어진다고 한동안 못 먹었으니깐. 남편한테 졸랐더니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둘이 손잡고 르메이에르 빌딩으로 낙지철판을 먹으러 갔다. 불과 몇시간 전 태극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던 자리를 촛불을 든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집에 먼저 간 친구들이 ‘조경수역’이라고 알려준 광화문 사거리 인근 지역엔 아직 집에 가지 않은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섞여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렇게 희한한 광경을 배경으로 회사 다닐때 데스크들이랑 자주 갔던 식당에서 낙지를 먹었다. 중부라인에서 한겨울에 손이 얼어터지는 와중에 집회 취재하다가 처음 알게된 사내커플의 결혼 첫 만찬으로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낮비행기였기 때문에 저런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날 오후 2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11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보딩패스를 받아들고 면세점 쇼핑을 좀 하다보니 시간이 후딱 흘러 보딩이 시작됐다. 타고갈 비행기는 인천에서 로마로 가는 알리탈리아항공 AZ759편. 이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반 정도(E티켓에는 12시간 55분이라고 나왔는데 실제 걸린 시간은 12시간반 남짓) 가면 로마 피우미치노 시간에 현지시각 오후 7시에 도착한다.

알리탈리아 항공은 처음 타봤다. 프리미엄이코노미석 티켓을 1인당 110만원쯤에 발권했다. 신행 가기 한달 전에 루프트한자 프리미엄이코노미-비즈니스석을 타고 다녀온 스페인 여행이 아주 만족스러워서, 기대했는데 결과적으론 가격대비 만족스러웠다. 루프트한자보다는 작은 듯하지만 그래도 우등고속 수준으로 레그룸이 넓은 편이었고, 발받침이 올라가서 다리가 덜 피곤하다. 기내식이야 원래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원래 지급된다고 알고 있었던 어메니티키트는 더이상 주지 않는 것 같다. 기내 엔터테인먼트는 한국어가 지원되지 않기 때문에 이 항공사를 이용한다면 자체 엔터테인먼트를 꼭 준비하시길.

▲여행 중 제일 신나는 순간. 타고 갈 출국비행기랑 인사하는 순간.

▲알리탈리아 프리미엄이코노미석 레그룸은 숏다리를 쭉 뻗어도 안 닿을만큼 널럴하다.

신부 입장곡으로 ost ‘A Whole New World’를 선택했을만큼 어린 시절 베스트 애니메이션이던 ‘알라딘’과,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 ‘말레나’를 기내에서 조금 봤다. 말레나를 조금 보다 만 것은 알라딘을 먼저 봤기 때문에 노트북 전원이 꺼졌으니깐. 영화 속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은 하얗게 빛나고 아름다웠다. 먹다 자다 깨다 몸부림치는 사육의 시간을 12시간 넘게 버티다보니 모니터에 나타나는 위치는 이오니아해를 지나고 있었다. 드디어 이탈리아 근처에 왔구나.

▲이탈리아 국적기에서 파스타를 먹었는데, 놀라우리만치 맛이 없다. 기내식은 허기를 면하라고 주는 음식이니깐.

▲비행기는 계속 서쪽을 향해 날았고, 해는 서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오니아해를 지나며.

로마공항에 내렸다. 오후 7시 15분. 출발할 때 30분 가까이 늦게 뜬걸 감안하면 선방한 시간이다. 환승시간이 채 두시간이 되지 못한지라, 과연 짐이 사람 따라 무사히 팔레르모 가는 비행기에 탈지 조금 걱정이 되긴했다. 공항 터미널을 돌아다니기엔 몰골이 너무 쩔어있기도 하고 피곤해서 미리 탑승구 앞에 가서 앉아있었다. 오후 9시에 출발하는 팔레르모행 비행기는 밤 10시 30분쯤 도착할 예정이었다. 보딩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밤비행기인데도 만석인 비행기에 타려는 사람들의 얼굴엔 피곤이 묻어있었다. 줄에는 우리 말고도 한국인 한팀, 일본인 한팀이 보였다. 닭장같이 좁은 비행기에 사람이 다 타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뜨겠구나’ 생각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일어났는데도 비행기는 여전히 활주로에 붙어있었다. 시간은 이미 30분 넘게 흘렀는데. 이륙 허가를 받은 비행기들이 줄줄이 밀려있어서 이륙이 늦어진다는 방송이 나왔다. 숙소에 도착할 시간이 대체 몇시쯤일지 조바심이 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눈이 감겼다. 아마 깨워서 일어났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팔레르모 공항에 내려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 1시간 10분이 걸린다면서 40분만에 왔다. 슈퍼카의 나라답게 비행기가 슈퍼카급으로 질주한듯.

▲팔레르모 공항. 나름 시칠리아 주도의 관문인데, 카타니아가 더 경제 중심지라 그런가 공항이 그닥 크진 않았다.

공항의 첫인상은 낡고 남루했다. 짐을 찾는 카루젤에 갔는데, 우리 짐이 나오지 않았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만약 짐이 분실됐을 때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돌기 시작했다. 아까 줄 설때 본 동양인 승객 몇명도 우리처럼 걱정스러운 얼굴로 컨베이어벨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짜증과 걱정이 뒤섞여 두리번거리던 눈에 ‘Baggage from non EU countries’ 사인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물어물어 non EU 국가에서 온 짐이 따로 도는 카루젤에 가보니, 눈에 익은 짐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럽을 여러번 다녔지만, 이렇게 아예 컨베이어가 따로 돌아서 사람 당황스럽게 만드는 공항은 처음이었음…

팔레르모 공항에서 팔레르모 시내까진 30분이 넘게 걸린다(고 구글맵님이 말해주셨다). 도저히 이 야밤에 초행길을 공항버스 타고 내려 찾아갈 자신이 없으므로, 그리고 우린 신혼여행 중이므로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내로 가는 도로 양옆으로 펼쳐지는 야경에 이런저런 설명을 매우매우 자세하고 친절하게 해주었다. 내 짧은 이탈리아어와 아저씨의 짧은 영어의 콜라보로 청해율은 60% 정도될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건 팔레르모 시내, 저쪽 보이는덴 항구, 팔레르모에서 남쪽으로 얼마나 가면 몬레알레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호텔 문앞까지 택시가 진입할 수 없어서, 기사 아저씨가 ‘콰트로 칸티’까지 가서 내려주겠다고 했다. 야밤에 낯선 길에 내리는걸 걱정하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저씨는 택시에서 내려 짐을 꺼내주면서 “저기 보이는 ‘따박’ 간판에서 10걸음 걸어가면 호텔 문 앞이다”라고 알려줬다. 택시에서 호텔 문앞까지 거리는 대략 20미터 정도. 친절한 아저씨 덕에 팔레르모의 첫인상이 좋아졌다.

콰트로칸티에 있던 호텔 이름은 ‘Eurostars Centrale Palace Hotel’. 오래된 옛날 저택을 개조한 호텔이라 로비부터 매우 고풍스러웠다. 건물이 ㅁ자 형으로 생겨서 가운데는 중정이 있고,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테이블들이 있었다. 1층 곳곳엔 화려하게 살롱스타일로 꾸며놓은 휴게 공간에서 차나 초콜릿을 먹을 수도 있었다. 리셉션 직원의 친절도는 쏘쏘한 편. 너무나 감동적인 서비스는 아닐지라도, 불편하지 않게 챙겨주는 정도라 나쁘지 않았다. 1박 잠만 자다갈 호텔이라 시내 가까운 곳에 수페리어 더블룸으로 예약했는데,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침구도 깨끗한 편이었다. 객실 곳곳이 낡아서 수리가 필요한 곳이 보이긴 했지만. 도심 곳곳이 낡아가고 있는 팔레르모의 모습에 어울렸달까. 심각한 문제는 딱 한게 있었는데, 샤워기 헤드 부분이 지저분해서 좀 찜찜했다.

그냥 호텔에서 짐풀고 잘까 하다가, 그래도 하루 묵는 팔레르모의 야경이 아까워서 밖으로 나섰다. 쇠락한 도시 같은 분위기, 시칠리아 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걱정어린 시선이 조금 걱정되어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것도 불안했는데 웬걸. 그날 무슨 축제라도 있었는지 길에 사람도 많았고, 거리 곳곳에 색종이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아까 택시에서 내린 콰트로칸티는 정신차리고 보니 더 아름다웠다. ’네개의 모서리’라는 뜻의 ‘콰트로 칸티’는 팔레르모의 가장 큰 도로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와 마께다 거리가 만나는 사거리였다. 사거리의 모서리의 건물은 분수대와 조각으로 장식돼있다. 장식은 삼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가장 아래쪽 분수는 사계절을 뜻하는 여신상, 2층 발코니는 스페인왕들의 입상, 가장 위쪽은 팔레르모의 수호성녀상이 서있다. 오렌지빛 조명이 아름답지만 낡은 조각을 비췄다.

▲사거리 하나만 잘 꾸며놔도 이토록 인상적이다. 콰트로 칸티의 야경. Quattro Canti..

마께다 거리를 따라 쭉 북쪽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길이 좀 넓어지더니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공터가 나타났다. 왼쪽에 그리스 신전을 닮은 큰 건물이 보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건물이다. 구글맵을 켜고 보니 예상하던 그 건물이 맞았다. 영화 ‘대부3’에서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소리없이 절규하던 그곳. 마시모 극장이 위풍당당하게 눈앞에 서 있었다. 오늘 공연을 막 마쳤는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을 깐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날 공연은 시칠리아 출신 작곡가 벨리니의 ‘노르마’. 시간이 맞았으면 보고 갔을텐데 아쉬웠다. 내가 노르마를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밌다’는 표정으로 봤으면, 남편 박모씨는 그 표정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신기하게’ 보다가 옆에서 잤겠지.

▲마시모 극장. Teatro Massimo. 낮에 봐도 멋졌겠지만, 영화 '대부' 시리즈의 팬이라면 밤에 가는게 좋은 것 같다. 가족들과 오페라를 보고 나오던 메리 코를레오네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에서 총에 맞아 "Dad..."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 무쇠같은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절규하는 영화 속 장면도 이날처럼 오페라가 끝난 저녁시간이었다.

아쉬웠지만 마시모극장에서 사진만 열심히 찍었다. 큰맘 먹고 들고온 DSLR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데, 온갖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던 우리를 바라보던 한 무리의 젊은애들이 있었다. 그중 한명이 다가와서 “사진 찍어줄까?”하고 물었다.

다가온 남자의 영국식 영어 억양이 굉장히 유창하고, 일행이 고급진 행색이라 사실 조금 망설였다. 고물 갤럭시노트로 찍는 얼큰이 셀카 대신 제대로 인간의 행색이 나온 투샷을 남기고 싶긴 했으니깐. 그래도 ‘먼저 사진 찍어주겠다고 다가오는 외국인은 일단 거절하라’는 여행 상식을 뿌리치지 못했다. 정중하게 “노땡쓰”라 말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꼬레아 델 수드”.

팔레르모의 일요일 밤거리가 생각보다 떠들썩해서 무사히 야경을 보고 호텔로 돌아와서 기절했다. 전날밤 호텔 욕실이 매우 험블해서(특히 물이 나오는 샤워기 헤드부분의 찜찜함) 못마땅했으나, 이튿날 조식은 매우 훌륭해서 언짢음이 조금 풀렸다. 조식에 나온 빵과 아란치니와 블러드오렌지주스가 되게 맛있었다. 아란치니는 시칠리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식이다. 토마토, 고기, 야채 등등 다양한 소를 쌀에 주먹만한 사이즈로 뭉쳐서 고로케처럼 튀긴 건데 한개만 먹어도 배불러진다. 2월은 블러드오렌지가 제철이라는데 갈라놓은 오렌지는 정말 핏빛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새빨갛다. 이 동네는 가는 호텔마다 모두 오렌지주스를 직접 짜주는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는데, 호텔마다 가당/무가당 여부, 오렌지 종류 등등이 제각각이라 먹어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러군데에서 블러드오렌지주스를 마셨지만, 이 호텔에서 먹은 새빨갛고 적당히 새콤달콤한 주스가 최고였다.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콰트로칸티를 이루는 비토리오엠마누엘레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를 걸었다. 넓은 공터가 보이더니, 구름 한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적갈색 대리석 건물이 보였다. 푸른색 돔 지붕과 양파 모양 창문, 높이 솟은 첨탑과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벽면, 그와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 성인과 성녀의 조각들, 이곳이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임을 알려주듯 정원을 장식한 야자수. 팔레르모 대성당의 거대한 건물에는 이 도시를 지배한 세력의 흔적들이 그대로 녹아있다. 대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은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모스크로 쓰이다가 다시 대성당의 이름을 되찾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다. 이 도시를 지배하고, 이곳에서 신을 찾았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흔적을 건물에 공들여 깊이 새겼다. 그 때문인지 1000년째 신을 위한 건축물로 그 용도를 지키고 있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듯 위풍당당한 팔레르모 대성당. Cattedrale di Palermo

대성당을 지나 또 5분 정도 걸어가니깐, 드디어 목적지인 노르만궁전이 나타났다. 비토리오엠마누엘레 거리와 맞닿은 면은 궁전의 뒷면이라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선 또 한참 건물과 성벽을 돌아가야 했다. 궁전은 아랍인들이 지었다는 꽤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 궁전에 온건 부속 건물인 ‘팔라티나 예배당’을 보기 위해서였다. 팔레르모 대성당과 인근 도시 체팔루와 몬레알레 대성당은 아랍∙노르만 양식의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 중 가장 백미로 꼽히는 몬레알레 대성당에 꼭 가고 싶었지만, 동선이 꼬이는 고로, 과감히 버렸다. 대신 몬레알레 대성당과 가장 닮았다는 팔라티나 예배당을 보기로 한 것. 팔레르모에서 가장 손꼽히는 관광지+현재도 사용되는 주요 관공서 건물인지라 금속탐지기로 검사를 받는다. 궁전 1층에서는 시칠리아 연해에서 발견된 해저 유물 전시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봐도 모르니깐 가볍게 패스하고 바로 2층의 팔라티나 예배당으로 갔다. 미사가 진행중이어서 마음대로 구경할 상황이 아니었다. 궁전의 다른 부분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궁전 일부는 시칠리아 주의회 의사당으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보안이 시칠리아의 다른 명소들에 비해선 보안이 삼엄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의사당 내부에 앉아볼 수도 있었고 궁전으로 쓰이던 여러 방들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공간은 중정과 회랑이었다. 기둥과 기둥을 잇는 아치로 ㅁ자형 중정을 만들었다. 얼마전 스페인 여행 갔을 때 그라나다와 세비야에서 본 무데하르 양식의 건물들의 중정을 꼭 닮았다.

다시 2층으로 내려가 팔라티나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미사가 막 끝나 경건한 공기가 남은 예배당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조로운 멜로디의 성가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조개 모양의 성수대에서 성수를 살짝 찍어 성호를 그었다. 시선이 처음 꽂힌 곳은 천장. 8명의 천사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모습이 황금빛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었다. 신약 내용과 사도행전을 묘사한 정교한 모자이크화를 채운 금빛 배경이 성당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당 내부는 모자이크 외에도 아치와 양파 창문, 아랍식 건물 특유의 복잡한 문양들로 장식돼 있었다. 신을 섬기는 방식은 제각기 달라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이 섬을 거쳐간 정복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나보다. 눈이 빠져라 천장만 바라보다가 문득 발을 딛고 있는 바닥에 시선이 멎었다. 바닥을 채운 섬세한 모자이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손이 닿지 않는 먼 곳만큼이나 손을 뻗으면 닿는 곳도 숨이 멎게 아름다웠다.

▲경건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Cappella Palatina

▲황금빛 천장 모자이크만큼이나 바닥을 가득 수놓은 모자이크 또한 환상적이다.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Cappella Palatina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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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1- prologue>

신혼여행 갔다온지 약 한달이 되어간다. 남편 박모(32)씨의 말에 의하면 이게 신행인지 극기훈련인지 패키지 여행인지 알 수 없는 난이도 상상상의 여행이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간 다녀온 유럽 여행 중 가장 여유가 넘치고 웰빙 돋았으며 즐겁게 먹고 마신 여행이었다.

사진을 미리 좀 올리긴 했지만 여행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중부지역으로 갔었다. 9박 11에 이르는 여행 기간 동안 5박은 시칠리아에서, 4박은 이탈리아 중부지역에서 머물렀다. 이번에 다녀온 시칠리아와 토스카나주와 움브리아주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중부는 같은 나라지만, 두 나라에서 머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토스카나 주는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압축한 고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단테 알리기에리 같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은 토스카나에서 태어났다. 현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 사투리에서 왔다. 구찌와 페라가모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도 토스카나주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냉정과 열정사이’,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도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탈리아 중부에 머무르는 기간엔 그래서 전형적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즐길 것들을 즐겼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 가까이 갈 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피렌체의 두오모, 오래된 골목 곳곳에 숨어있는 예쁜 가게들 등등.

같은 이탈리아 국경 안이지만 시칠리아의 공기는 토스카나와 전혀 다르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붙어있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이탈리아 중부나 북부에서 볼 수 있는 세련미는 덜하다. 이슬람 왕국과 노르만 왕조의 지배를 거친 섬에는 아직도 이국적인 자취가 남아있었다. 2월말에도 따뜻한 날씨에 꽃이 활짝 만개한 곳은 자로 잰듯 깔끔하게 다듬은 정원이 아니라 아몬드나무와 벚나무를 심어놓은 과수원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섬이었지만, 여전히 불과 연기를 뿜고 있는 에트나 화산을 품고 있는 섬은 문자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행하기에 모든 것이 편리한 ‘완성된 여행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것은 둘째치고 4차선 이상의 도로를 보기조차 힘들었다. 피아트 소형차를 몰아도 마음만은 슈퍼카 드라이버인 시칠리아 운전자들은 그 시골길마저 150km로 밟아가며 서행하는 앞차에 하이빔을 갈겨댔다. 비수기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피렌체와 달리, 날씨가 암만 따뜻해도 이 섬 기준으로 ‘비수기’인 2월에 시칠리아의 가게와 식당들은 문을 닫는다. 길 가는 사람에게 영어로 길을 물어 원하는 답을 얻을 가능성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마치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시칠리아행을 추천하고 있다. 육지와 비교도 안되는 싼 가격에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까놀리 같은 돌체, 에트나산 화산토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 사면을 둘러싼 바다에서 잡아올린 해산물, 올리브유와 꿀 같은 싱싱한 식재료 등등. 정말 후술할 딱 한군데 빼곤 어디서 뭘 먹든 다 맛있었다. 파랗게 빛나는 바다와 야자수와 만개한 벚꽃과 까만 화산암 위에 쌓인 흰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을 거쳐간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자연 속에 자신들의 흔적을 수놓았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하이빔을 갈겨대며 과속을 종용하다가도 낯선 동양인 관광객이 곤경에 처할 것 같으면 차를 세워가며 도와주곤 했다. 영어를 못해 말이 안통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불러올 때까지 열심히 설명했다.

겨울에 갈만한 따뜻한 여행지 추천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주저없이 시칠리아를 추천하겠다. 아직 동양인 여행자가 흔치 않은 섬에서 정말 ‘외국’에 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참고로 다니는 동안 동양인 여행객은 딱 네팀을 봤다. 한국2, 일본1, 중국1). 이 섬이 보여주는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섬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게 아쉬워질게 분명하다.

▲팔레르모 노르만궁전 내부에 있는 '팔라티나 예배당(Cappella Palatina)'의 바닥 모자이크

▲아그리젠토 근교 해안가, '터키인의 계단(Scala dei Turchi)'

▲아그리젠토, 숙소 옆 과수원에 핀 봄꽃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계곡(Valle dei Templi)

▲시라쿠사에서 카타니아 가는 E45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길에 본 에트나 산

▲에트나산 정상...은 아니고 중간쯤에 있는 분화구

▲아씨시, 성프란체스코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몬테풀치아노 어디쯤인가, Val d'Orcia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Brunelleschi's Cupola of The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항공
: 이탈리아 국적기인 알리탈리아를 이용해 로마 환승편으로 팔레르모나 카타니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번 여행의 경우 알리탈리아 프리미엄이코노미석을 1인당 왕복 110만원에 구매했다. 로마까지의 실제 비행시간은 12시간 30분 정도였고, 로마에서 2시간 남짓을 기다려 팔레르모행 국내선을 탔다. 로마에서 팔레르모까진 1시간 정도 걸린다. 시칠리아를 떠날 땐 카타니아 공항에서 국내선을 탔다. 카타니아에서 피렌체 공항으로 바로 가는 부엘링을 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탑승 시간이 밤 11시로 바뀌어서 취소하고 로마로 가는 알리탈리아를 탔다. 가격은 둘이 비슷하게 한화 10만원 정도. 귀국할 때는 피렌체 공항에서 로마로 가서 환승하는 알리탈리아편을 탔다. 역시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으로 발권했으나, 탑승시 게이트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받았다.

=숙소
: 부킹닷컴으로 모두 예약했고, 9박의 총 숙소 비용은 대략 2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비수기 시칠리아의 숙박비가 쌌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아그리젠토의 ‘Villa Athena’의 경우 5성급 호텔인데 신전이 보이는 좋은 방이 1박에 150유로 정도. 숙소에 대해선 각 포스팅에서 후술할 예정.

=렌트카
: 시칠리아에서는 AVIS를 이용했다. 길이 좁기 때문에 큰 차 빌리면 안된다는 조언을 듣고 갔고, 매우 일리 있는 말이었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차량인 ‘야리스’ 오토를 몰았는데, 차가 작아서 고속으로 달리면 좀 불안하긴 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AVIS의 자체 풀커버리지 보험 덕에 돌 튀는 시골길도 안심하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덤. 로마부터 피렌체까지는 Alamo를 가장한 Locauto에서 폭스바겐 골프를 빌렸다. 차 사이즈나 다른 성능은 나쁘지 않았는데,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스크래치 때문에 385유로를 물었다. 그러나 다행히 렌탈카스닷컴의 풀커버 보험으로 환급 받았음. 아, 여기도 유럽이기 때문에 오토 차량을 몰려면 반드시 미리 예약해야한다. 일단 오토 차량 자체가 많지 않고 스틱보다 비싸다. "꼬레아에선 사람들이 대부분 오또마띠-끄를 모느냐, 대체 왜?? 그럼 마뉴엘-르는 잘 안 모느냐??"라고 의아해하던 팔레르모 AVIS 직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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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개항한 후 메이지 시대에 3000m가 넘는 중부 산속 깊은 오지까지 들어온 영국인이 있었다. 알프스에 아마도 가봤을 그는 근육질 산들로 둘러싸인 이 고장에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 중부의 히다, 기소, 아카이시 산맥은 '일본 알프스'가 됐다. 가미코지가 위치한 히다산맥은 알프스 산맥의 북쪽 부분이라

중부 산악지대 여행의 거점인 다카야마(高山)에서도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는 깊은 산속에 가미코지가 있다. 애초에 이번 일본 여행을 계획한 근간은 가미코지(上高地)였다. 上高地. 어딘가의 위에 있는 고지대라는 뜻일까. 높은 곳에 있으니 붙인 이름이겠지. 공기와 물이 맑을 것 같은 이름이다.


다카야마에서 가미코지로 향하는 첫번째 버스에 올랐다. 가미코지란 이름에 대한 생각들을 계속 되뇌었다. 일본어를 모르니깐 저걸 가미코지라고 읽는지, '상고지'를 일본어로 가미코지라고 읽는지조차 몰랐다. 문득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때 일본어를 모르는 친구 E와 도쿄에 갔던 게 생각났다. 둘 다 한자도 제대로 못읽어서 지명을 읽을 땐 '신O'처럼 한두 글자를 빼먹고 찾았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가 소스라쳤다. 그닥 크지 않은 버스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로 닦인 좁고 굽이치는 길을 마치 곡예하듯 달렸다. 버스 안내방송이 다이쇼연못(다이쇼이케∙大正池)을 알릴 때 벨을 눌렀다. 사람들이 제법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그냥 사람들을 쫓아가도 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잘 보이는 화살표를 따라가도 된다. 잠시 언덕길을 내려오는 듯하더니 어느새 눈 앞에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펼쳐진다.





연못에 붙은 '다이쇼'라는 이름은 연호에서 왔다. 다이쇼 4년(1915년) 야케다케(焼岳)산이 분화하면서 쏟아진 토사가 이 일대를 흐르던 아즈사강을 막아버리면서 연못이 생긴 데서 따온 것이다. 바람이 잔잔할 땐 이 연못을 만든 야케다케 산이 거울처럼 잔잔한 연못 위에 비친다는데, 이날은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그런 장관을 보진 못했다. 연못 곳곳엔 물에 잠겨 고사한 나무의 밑둥이 표지석처럼 남아 이 곳이 원래 울창한 숲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물은 정말 신비스러울만치 맑다. 떠다니는 부유물조차 없는데, 장엄한 고산이 펼쳐진 배경과 박혀있는 고사목이 어울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연못 주변 양지바른 곳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불과 100년 전 이 절경이 만들어진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표지판을 따라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야생동물의 흔적이 종종 보인다. 가장 흠칫 놀라는 건 '곰조심'이다. 몇월 며칠 몇시에 곰을 봤다는 구체적인 목격 기록을 붙여놓는데, 막연한 걱정이 현실적인 긴장감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마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 이 산책로를 걷다보면 곰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햇살 좋은 어느 오후 갑자기 곰이 나타나기엔 가미코지 산책로는 너무 개방된 공간이었다. 낙엽송이 쭉 뻗은 숲 사이로 나 있는 오솔길은 수정처럼 맑은 강물을 따라가기도 하고, 강물을 이어지기도 했다. 오솔길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서 가던 일본인 부부가 탄성을 질렀다. 길 바로 옆 나무에서 움직이는 뭔가가 보였다. 얼굴이 빨간 일본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바로 옆 빨간 열매가 열린 나무엔 원숭이 두마리가 가지를 타고 다니며 나무 열매를 입에 넣기 바빴다. 사람을 겁내지도, 의식하며 접근하지도 않았다. 때묻지 않은 원숭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다이쇼이케부터 시작하는 가미코지 초입은 10월 하순에 이미 낙엽이 진 상태였다. 시기를 잘못 택한 것인가 고민이 되던 찰나에 갑자기 시야가 금빛으로 가득 찼다. 쭉뻗은 금빛 낙엽송 군락이 강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세가지 색깔 뿐이었다. 파란 하늘, 아직 초록빛이 진한 고산, 낙엽송과 억새의 금빛. 정해진 산책로를 포기하고 물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강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강변 자갈을 밟으며 낙엽송과 강물을 따라 걸었다. 붉고 노란 원색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종류의 가을 나무를 지금껏 보지 못했다. 뼈대를 드러내기 시작한 가을산이 앙상해지기 직전, 거센 비바람이 한번 불어 한 해 나뭇잎의 수명을 끝내버리기 직전, 마치 봄여름의 햇살을 다 빨아들여 발산하는 듯한 금빛은 어딘가 슬펐다.




아즈사 강변을 걸을 땐 자갈 밟는 소리와 강물 흐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강물이 흘러오는 곳을 향해 계속 걷다보면 갑자기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보였다. 하이킹 코스의 종착점인 '갓파바시(河童橋)'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들 틈바구니에서 갓파바시 한가운데에 선다. 강물이 시작되는 방향을 바라본다. 고개를 들면 3000m가 넘는 준봉들이 병풍처럼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잔잔한 풍경을 늦가을 산바람이 깨울 때까지 그 곳에 서 있었다.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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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받은 승차권이 바로 이거다. 헤이세이 '27년' 10월 29일까지 유효하다는 스탬프를 찍어주고 안쪽을 펼치면 버스로 갈 수 있는 지역도 표시해놨다. 승차권을 교환하고 대합실 안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샀더니 금방 10시 40분이 됐다. 가미코지로 가기 위해 먼저 거쳐야 할 '히라유(平湯) 온천'까지 갈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다. 히라유/신호타카 선 버스는 히라유 온천과 후쿠지 온천 등 북알프스 지역의 산속 온천 지대를 지나서 신호타카 로프웨이까지 간다. 다음날 신호타카 로프웨이를 타러가기 위해서도 다시 타야할 버스였다. 산악 지대 관광을 책임지는 버스 노선이라 그런지, 버스는 거의 꽉 찼다. 그중 2/3 정도는 외국인.


-중간에 작은 정류장 몇개를 지나쳤던 것 같은데 정말 칼같이 11시 23분에 버스는 '히라유 온천' 터미널에 도착했다. 제법 구색을 갖춘 식당과 스낵코너와 기념품점을 갖춘 건물 앞에 버스가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건물 한 구석으로 가서 가미코지로 가는 버스 승차권을 사야한다. 불행히도 '히다지 프리 깃푸'는 가미코지선까진 커버해주지 않았다. '히다지'를 낸다고 따로 할인 같은 건 없고 짤없이 2000엔(왕복)을 낸다. 히라유 온천에서 가미코지까지 가는 버스는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간식으로 요기를 한 뒤 정확히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여기서 또 20분 정도 가야 가미코지에 도착한다. 가미코지에서 내릴만한 정류장은 세곳이 있다. 다이쇼연못(다이쇼이케∙大正池)/데이코쿠호텔/가미코지 터미널 순서.


-히라유 터미널에서 버스 티켓을 사고 5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터미널을 휘휘 둘러보면 '규망(牛まん)'을 파는 간식 코너가 보인다. 이 지방의 특산물인 '히다규(飛騨牛)'를 넣은 중국식 만두인데, 찐빵만한 크기의 밀가루 찐빵과 만두 사이 그 무언가에 간장 양념을 한 쇠고기가 들어있다. 420엔이라 찐빵치곤 비싸지만, 나름 쇠고기 찐빵이니깐. 이 터미널에선 히다규 조각을 끼운 '소꼬치'도 판다. 900엔 정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벼르다가 돌아오는 길에 맛을 봤다. 주문을 하면 할아버지가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하는데 고기 굽는 냄새값이 한 200엔 정도. 식욕이 폭발하는 냄새다. 한 15분 정도 후에 완성되는 꼬치맛은... 카메라 초점을 잃게할 맛이다. 비싸지만 맛있다.



-가미코지를 둘러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이쇼이케 정류장에서 내려 갓파바시까지 걷는 하이킹 코스를 택했다. 2시간 좀 넘게 걸렸는데 중간에 쉬면 더 걸릴 수도. 갓파바시에서 5분 거리에 가미코지 버스 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에서도 매 정각과 30분에 히라유 온천까지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가미코지 데이코쿠 호텔은 일본에서 꽤 이름난 '데이코쿠 호텔' 체인이다. 호화스러운 숙박시설에서 '숙도락'을 즐기려면 이곳에 하루 묵는 것도 좋다. 단, 가미코지 입장이 제한되는 11월부터 4월까지는 호텔도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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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40분 만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나고야 공항은 2013년에 출장으로 와보고 두번째였는데 적당히 설레는 공항 분위기를 내면서 너무 복잡하지 않은 편리한 공항이다. 입국장을 나와 무빙워크를 타고 나오면 인포메이션센터가 있고, 시내로 가는 '메이테츠'선 매표소가 있다. 여기서 가장 빠른 메이테츠선을 타고, 나고야역으로 갔다(메이테츠선은 급행, 일반, '뮤'가 요금이 다르다).


나고야역에 도착해 가장 먼저 '미도리노마도구치'를 찾았다. 예전에 모리오카역에서 JR동일본패스 사다가 기차 놓치고 아오모리 갈뻔한 아찔한 경험이 있어서 괜시리 긴장이 됐지만 역시 대도시 나고야의 위엄. 나고야역 미도리노마도구치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Shinkansen and JR line tickets'라고 써있는 창구에 가서 부탁하면 된다. 일본어를 전혀 못하므로 영어로 말해도 '히다지 프리깃푸'만 제대로 전달하면 전혀 이상이 없다. 택시/버스 중에 뭘 고를건지, 몇사람이 쓸건지, 첫 목적지가 어딘지 등등 대화가 오가면 발급이 끝난다.


나고야역에서 시간이 좀 떠서 점심을 먹었다. 나고야역은 꽤 큰 역인데 'Taikodori side' 쪽으로 갔다. 역사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역사 밖 바로 앞에 '에스카(エスカ)' 지하상가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에스카 지하상가엔 야바톤(미소카츠), 이노우(히츠마부시), 야마모토야(미소니코미우동) 같은 나고야 맛집 분점들이 많이 입점해있다. 당연히 사람은 많고 어느 가게나 좀 맛있어 보이면 어마어마하게 줄을 선다.


이날 결국 간 곳은 '키시멘노요시다(きしめんの吉田). 1890년에 문을 연 유서깊은 가게의 분점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자리를 잡고 자루텐(자루키시멘+덴뿌라)과 따뜻한 키시멘을 하나씩 시켰다. 나고야 음식인 키시멘은 칼국수 같이 납작한 모양의 우동인데, 따뜻한 가쓰오 국물에 말거나 차게 식혀 쯔유를 찍어먹는다. 2년 전 나고야에 왔을 때도 먹어본 적이 있는데, 거창하게 꾸밈 없이 소박하지만 기본이 충실한 맛이다. 단순한 맛의 육수에 쫄깃한 면의 조합은 훌륭했다. 여행 첫날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맛이었다.


밥을 먹고 기차시간이 되어 플랫폼으로 갔다. 창문이 넓은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이래서 이름이 '와이드뷰'인가보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면 기차가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모든 객차가 역방향이라 이게 뭔가 했는데, 조금 있으면 어느 지점에서 기차가 다시 정방향으로 가기 시작한다. 2시간 정도 달려 기차는 게로(下呂)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게로역에 서고, 승객들이 대합실로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게로의 풍경은 각자 료칸의 팻말을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송영버스 기사들이다. 유니폼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승객들을 웃으며 맞이하는 첫인상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인상 좋은 아저씨를 따라 유노시마칸 송영버스에 올랐다.


게로역에서 유노시마칸까지 가려면 히다강을 건너고, 온천마을을 가로질러 언덕배기를 올라야한다. 히다강을 건너다보면 오른편 강변에 노천온천이 보인다. 정말 주변에 건물 하나 없이 강변에 온천수가 모락모락 솟아나는 자연 그대로의 노천온천이다. 헉 하고 놀라는 사이 자세히 보니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강을 건너고, 온천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보면 온천사라는 작은 절이 나온다. 언덕을 따라 이름 모를 나무가 시원스럽게 쭉쭉 솟아있다. 한국에서 보기 쉽지 않은 키큰 나무들을 신기해하다보면 웅장하게 솟은 고색창연한 건물이 나온다.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유노시마칸' 본관이다.



본관 앞에 송영버스가 서면 료칸 직원들이 나와 손님들을 맞았다. 버스 트렁크에 실은 캐리어도 손빠른 료칸 직원들이 안으로 들고 들어간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나면 나카이상이 나와 유카타를 고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유노시마칸에서 자랑하는 서비스인 모양인데, 여성 손님의 경우 다양한 색깔과 무늬의 유카타를 취향대로 직접 고를 수 있게 한다. 키에 따라 사이즈를 구비해놨고, 2박 이상인 경우엔 바꿔 입을 수도 있다. 고른 유카타를 들고 방으로 향한다. 짐을 양손에 든 나카이상이 문을 열어주고, 방 안내를 도왔다. 정원을 조망하는 구관 객실은 아래처럼 생겼다.


▲유노시마칸 본관 객실 내부(출처: 유노시마칸 홈페이지)


은은하게 다다미 냄새가 나면서 세월의 흔적이 맵시있게 남은 방이었다. 구관 일반 객실엔 세면대와 화장실은 있지만 따로 욕실이 딸려있진 않다. 그 외엔 필요한 모든게 알차게 갖춰진 객실이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공간은 창문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였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기 좋은 공간이었다. 1층 객실이라 창 밖으론 섬돌이 놓여있고 게다가 두켤레 앙증맞게 놓여있었다. 방까지 안내를 맡은 나카이상은 방 이곳저곳을 설명하더니, 저녁식사와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싶은 시간을 물었다. 원하는 시간에 저녁은 방 안에서, 아침은 식당으로 이동해 먹는 시스템이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숙소 구경을 하다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됐다. 나카이상이 와서 저녁식사 준비가 됐냐고 물은 뒤, 오케이하면 상을 치운 뒤 떡벌어지는 가이세키 요리가 차려진다.




고급료칸이니만큼 가이세키는 훌륭하다. 싱싱한 재철 산지 재료의 맛을 살리면서도 멋내는 걸 잊지 않았다. 눈으로 보는 요리답게 손대기 아까울만한 플레이팅으로 나오는 요리가 많았음. 어느 하나 흠잡을 게 없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히다 지방의 특산물인 히다규(飛驒牛) 샤브샤브였다. 그림으로 그려넣은 듯한 마블링이 고운 쇠고기를 보글보글 끓는 육수에 투척하는데 고기가 꽤 두꺼워 익는데 오래 걸린다. 그러나 쇠고기이므로 다 익기도 전에 흡입... 일본에서 고베규, 마쓰자카규와 함께 최고급 쇠고기로 쳐준다는 히다규답게 입에 들어가면 착 달라붙더니 사르르 녹는다.


화려한 만찬이 끝나고 나면 료칸직원 두명이 '시쯔레이시마스~'하고 문을 두드린다. 이불을 깔아주러 온 것인데, 기합을 넣어가며 이불을 반듯반듯하게 펴내는 것도 나름 볼거리였다. 이불을 다 깔고 나면 척 고개숙여 인사까지 하고 방을 떴다.


이제 료칸 직원들이 방에 드나들 일은 모두 끝난 것 같아서 온천욕을 하러 가기로 했다. 유노시마칸엔 남녀 따로 쓰는 대욕장과 노천탕, 대절해서 쓸 수 있는 가족탕이 있다. 가족탕은 사실 그냥 프라이빗하단 거 외엔 목욕탕 분위기라 패스하기로 했고, 바로 대욕장으로 갔다. 대욕장과 노천탕은 연결돼 있으며, 매일 새벽에 남녀탕을 바꾼다고 했다.


온천물은 투명하다. 츠루노유 온천의 뿌연 유황온천수와 비교하게 됐는데, 눈으로 볼 땐 아주 맑고 별다른 냄새도 나지 않는다. 온천은 약한 유황 성분이 들어있는 알칼리성 온천이다. 온천에서 나오면 피부가 느껴질 정도로 보들보들했다.





▲유노시마칸 노천탕(위)과 대욕장(아래)(출처=유노시마칸 홈페이지)


온천을 하고 객실로 돌아오는 길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듯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판기가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으므로 산토리 프리미엄몰츠를 하나 뽑아 객실로 돌아왔다. 창밖 의자에 앉아 바라본 숲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무 바닥은 차가웠다. 차가운 맥주를 따서 한모금 넘기자 따뜻해진 속으로 청량한 기운이 퍼졌다. 피로가 사르르 녹았다.


TIP)

-유노시마칸 객실 내부에선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다. 로비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유노시마칸 송영버스 이용을 위해선 미리 료칸에 전화해 도착시간을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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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결심하고 머리를 식히러 갈 여행지를 찾아보게 됐다. 오고 가는 길이 힘들지 않도록 거리가 가까울 것(직항편이 있을 것), 극기훈련 같은 여행일정 대신 맛있는 것 먹고 쉴 수 있는 곳일 것, 가을을 즐기기 좋은 여행지어야 할 것- 같은 조건들이 붙었다. 


어느날 웹서핑을 하다가 '일본 10대 단풍 명소'를 뽑아놓은 포스팅을 봤다. 불타오르는 듯 화려한 교토의 붉은 단풍, 은행나무가 펼쳐진 일본 어딘가의 도시 등이 상위권에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눈에 들어온 것은 거울같이 맑은 강가를 따라 펼쳐진 황금빛 낙엽송 숲이었다. 낙엽송 군락 너머론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가미코치(上高地)란 곳에 꽂혀버렸다.


가미코치는 일본 중부에 펼쳐진 '일본 알프스'의 3000m급 산들로 꼭꼭 둘러싼 곳이다. 교통편은 당연히 불편하고, 근처에 숙소도 마땅치 않았지만 낙엽송과 연못, 강물이 어우러진 풍경 사진만 봐도 눈이 정화되는 듯 청정함이 느껴졌다. 가미코치에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참고해 코스를 짰다.


숙소는 가미코치에서 얼마 떨어진 기후현의 게로온천에 잡았다. 온천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게로역에선 기차와 버스로 다카야마와 북알프스 지방을 당일치기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로에서 묵을 숙소는 80년이 넘은 유서깊은 '유노시마칸(湯之島館)'으로 정했다. 게로온천마을 중심부에선 떨어져 있었지만, 한적한 숲속에 있는 유서깊은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바닥을 상상하며 그곳 구관을 예약했다. 여러 호텔 예약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지만, 유노시마칸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는 편이 가격이 조금 저렴했고, 선택할 수 있는 플랜 옵션도 많았다(http://www.yunoshimakan.co.jp/ 영문 홈페이지 있음).



▲1931년 문을 열었다는 유노시마칸. 3박을 묵었던 본관 모습.


비행기는 중부지방의 관문 나고야공항을 이용하기로 했다. 북알프스를 여행할 때 도야마공항을 이용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나고야 운항편이 편수도 많고, 비행기 시간도 마음에 들었다. 나고야에서 게로역까지 이어주는 'JR와이드뷰 히다'라는 재밌는 이름의 기차도 타보고 싶었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8시 5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했다. 대한항공, 아시아나, 제주항공이 나고야까지 직항을 운항한다.


▲게로에서 히다지방 여행의 중심지 다카야마(高山)까지 이어주는 'JR와이드뷰 히다'


'히다(飛騨)' 지방은 게로, 다카야마, 히다후루가와 등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게로에서 가미코지나 신호타카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데도 꽤 교통비가 나갈 것 같아서 패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히다지방에서 이용할 수 있는 패스엔 두가지가 있는데,


1. 히다지 프리깃푸(17800엔/2인-사람이 늘 때마다 요금 싸짐)

-나고야역에서 살 수 있음.

-'JR와이드뷰 히다' 지정석 2회, 자유석 무제한 이용 가능

-버스나 택시 중 선택 가능. 버스 선택시 다카야마에서 히다지방 다니는 일반버스 무제한(히라유~가미코치 구간은 유료).

-유효기간 3일


2. 알프스 와이드 프리 패스포트(10290엔/1인)

-다카야마 '노히버스센터'에서 살 수 있음.

-다카야마 시내, 오쿠히다 온천마을, 가미코치 등 노선버스를 나흘동안 이용 가능

-JR와이드뷰 히다 타려면 돈 내야함

-유효기간 4일


유효기간이나 포함되는 교통수단의 차이 등이 있지만 내 경우 1이 더 쌌기 때문에 나고야 역에서 히다지 프리깃푸를 사서 사흘 동안 요긴하게 썼다.


계획표조차 제대로 안 짜고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다보니 출국일이 됐다. 사실 놀고 먹고 쉬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유럽갈 때처럼 복잡하게 계획표를 촘촘히 짤 필요도 없었다. 급하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워낙 평화롭고 한적한 고장이어서 그런가 별다른 돌발상황도 없었고 아주 매끄러운 여행이 됐다. 쉬고 싶은데, 동남아의 휴양지 취향은 아니면서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할만한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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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가타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은 니이가타 공항을 이용하는 방법과, 도쿄로 이동해 하네다나 나리타 공항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니이가타 공항을 이용하는 항공편은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최소한 오전 7시엔 공항에 도착해야겠다. 너무 시간 여유 없이 서둘러야 할 듯해서, 오후 1시 55분에 나리타 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료칸에서 차려준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뒤 에치고유자와역까지 가는 송영버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Shuttle bus to the station"이라고 말해도 알아듣는데 한참이 걸린다. 손짓발짓과 필담을 하면서 간신히 의사를 전달하고, 송영버스를 '오쿠리'라고 부른다는 팁도 얻었다. 

야마노야도에서도 그렇고, 쇼센가쿠 카게츠도 그렇고 손님이 체크아웃을 할 때면 료칸의 직원들은 이곳에서 머물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꼭 묻는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 됐다-이곳에 묵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며 문을 나서면 료칸의 직원들은 따라 나와 문앞에서 손을 흔든다. 그냥 좀 흔들다 마는 게 아니라, 손님을 태운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진득이 서서 계속 흔든다. 정말로 이곳을 떠나는 나의 아쉬움을 함께 공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저 나의 생각 혹은 상상일 뿐이더라도 료칸에 자꾸 오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에치고유자와역에 도착했다. 료칸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계신 아저씨는 일본어를 못 알아들어도 천천히 반복하며 더듬더듬 영어를 섞어 따뜻한 배웅을 했다. 오전 9시 17분 에치고유자와역 플랫폼에 들어선 신칸센 MAX토키 열차를 타고 도쿄역을 향해 떠났다. 

눈의 고장을 떠나자마자 다시 지나게 된 긴 터널은 바깥 세상을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 마냥 나눠놨다.  한시간 남짓 달려 도쿄역에 도착했다. 도쿄역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지나던 서울역을 닮았다. 도쿄역사를 그린 도안이 숫자 100과 함께 곳곳에 붙어있어다. 벌써 100년이나 된 이 역은 지상, 지하에 걸쳐 온갖 종류의 기차 노선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상의 신칸센 승강장에서 가장 지하 아래층 나리타익스프레스 플랫폼까지 가는덴 2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급행열차 '나리타 익스프레스(NEX)'는 오전 11시 3분 정시에 도착했다. 얼마 전 작고한 디자이너 에쿠안 겐지가 디자인한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편리하고 쾌적하다. 도쿄역에서 나리타 공항까지 가는데 9000엔이 넘는 비싼 가격이 흠이지만 JR패스 소지자라면 추가요금을 낼 필요가 없으니 이용해볼 만하다. 대한항공은 나리타 공항 1터미널에서 출발한다. 

나리타 익스프레스에서 내려 공항까지 들어가기 전 간단한 보안검색을 치른다. 오래 걸리진 않지만, 출국 절차를 치르기 전 다시 한번 출국심사와 보안검색을 거쳐야 하니 시간을 여유있게 잡는 게 좋다. 나리타 공항 면세점은 생각보다 살게 많지 않지만 과자나 초콜릿 같은 식품류는 종류가 다양하다(중국인 단체 관광객이랑 비행 시간이 겹칠 경우 인기 상품이 품절되는 경우도 간혹있다)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귀국편 비행기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떠난 일본 여행은 녹록지 않았다. 수도 도쿄에서도 꽤 먼 데다, 오랜 세월 관광지로 붐비던 곳도 아니라 영어 구사가 가능한 현지인도 별로 없었고 영어 표기가 안 돼 있는 곳도 많았다. 그래도 큰 사고나 큰 불편함 없이 원하던 대로 설국에서 마치 꿈꾸다 온 것 같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애써준 친절한 사람들 덕분이 아닌가 싶다. 눈 속에 꽁꽁 숨겨놓은 보물 같은 아키타현 츠루노유와 소설 '설국'의 환상적인 정경이 펼쳐져 있는 에치고유자와 모두 매력적인 곳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기억을 복기하다보면 내년에 또 가고 싶은 곳과 5년쯤 후에 또 가고 싶은 곳, 10년 후에 또 가고 싶은 곳이 나뉜다. 내년 겨울에도 끌리듯 설국을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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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끌려 설국의 온천장을 해마다 찾았다. 유자와마치(湯沢町)에서 '설국'이 잉태된지 80년이 지났지만, 마을은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흔적에 끌려 설국을 찾은 사람들로 붐빈다. 고마코가 도쿄로 돌아가는 시마무라를 배웅하던 기차역엔 색색의 스키웨어를 입은 젊은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역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 근처에 있는 가라유자와스키장(ガーラ湯沢スキー場)으로 향했다. 유자와마치엔 나에바스키장(苗場スキー場), 유자와코겐스키장(湯沢高原スキー場) 등 크고 작은 스키장들이 모여있다. 산 위로 올라가 다른 스키장으로 건너 내려갈 수도 있고, 역과 몇개 스키장을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스키장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가라유자와스키장은 겨울에만 임시로 문을 여는 가라유자와역과 바로 연결돼 있다. 리프트권을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향했다. JR이스트패스나 JR간토에어리어패스 이용자는 여기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매표소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JR패스를 갖고 있냐고 물어보는데, 그렇다고 하면 알아서 리프트 전일권+로커이용권+스키/스노우보드 렌탈 10% 할인권을 묶은 3100원짜리 상품을 안내해준다. 리프트 전일권 정상가격이 4600엔이고 반일권은 3500엔이란 점을 감안하면 훨씬 싸다(따로 사면 로커도 유료다). 10% 할인 받은 스키 장비까지 반일로 빌렸더니 3330엔이 나왔다. 스키장에 입장하는데 든 총비용은 6430엔, 한화로 5만9000원 정도다. 

스키 장비를 빌리기 위해 렌탈숍으로 갔다. 렌탈 신청서를 먼저 작성하고 데스크에 내는 절차는 한국과 똑같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라 시즌 중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외국인 직원이 여러명 상주하면서 업무를 본다. 일어를 못해도 스키장까지 들어가는덴 별 불편함이 없다. 

▲중간 휴게소인 '치어스(Cheers)'로 올라가는 곤돌라. 

곤돌라를 타고 스키장 슬로프가 시작되는 휴게소 치어스(Cheers)로 올라간다. 치어스를 기점으로 이곳에서 또 리프트를 타고 10여개 중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 스키를 즐기면 된다. 적당한 난이도로 라이딩을 즐기기 위해 초급자 코스인 '에델바이스'와 중급자 코스인 '소셔블'을 골랐다. 비교적 완만한 코스에서 직선과 S자형 활강을 번갈아가며 설원을 달릴 수 있다. 매표소에서 나눠주는 코스맵엔 코스 길이와 폭, 경사도까지 자세히 나와있어서 스키 실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할 때 편리하다. 넓은 코스에서 유유히 활강을 즐길 수도 있고 낭떠러지를 끼고 난 좁은 산길을 따라 내려올 수도 있다.


▲, ▲치어스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 '소셔블' 코스 정상에서. 활강 직전. 

'소셔블'과 '에델바이스' 코스를 이용하려면 4인용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데, 코스가 워낙 여러개라 리프트 대기 시간이 거의 없다. 설질(雪質)은 파우더처럼 부드럽고 폭신하다. 깃털처럼 가벼운 건설(乾雪)이라 활강하는 스키어의 뒤로 스키 날에 부딪친 눈이 고운 가루가 돼 산산이 부서진다. 눈이 잘 뭉치지 않기 때문에 아이스 구간이 없고, 눈밭에 넘어져도 아프지 않다. 정상으로 올라가니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다소 서늘했지만, 전체적인 추위는 서울보다 훨씬 덜했다. 

▲▲중급자 코스인 소셔블 슬로프 중간. 슬로프가 길기 때문에 스키어나 스노우보더들은 가장자리 평지에서 쉬어가기도 한다. 

▲산길을 따라 나있는 초급자용 '에델바이스' 코스. 폭 3m 정도되는 코스인데, 낭떠러지를 끼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재미가 있다. 

4시간 정도 오전 라이딩을 마친 뒤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간다. 땀과 눈에 젖은 스키복을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말린 뒤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들이 모인 역 앞 번화가를 돌아본다. 따뜻한 국물이 땡기던 참이라 '나카노야'와 함께 유자와에서 직접 뽑은 국수로 유명한 '신바시(しんばし)'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따뜻한 우동과 차가운 소바, 막 튀겨낸 덴푸라를 주문했다. 따뜻한 국물과 덴푸라의 기름기가 들어가니 오전 내내 운동으로 지친 몸에 기운이 좀 돈다. 짭짤한 쯔유에 찍어먹는 깔끔한 자루소바와 메밀면수로 입을 가시고 식당을 나왔다. 

점심식사를 하고 문득 이곳에 와서 식후에 버릇처럼 먹던 커피를 한번도 제때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모처럼의 운동으로 더욱 지친 몸에 카페인과 당(糖)이 필요하다면 에치고유자와역 서쪽 출구 바로 맞은 편에 있는 '하타고 이센(HATAGO 井仙)'을 추천할 만하다. 원래 하타고 이센은 이번 여행에서 고려했던 숙소 목록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요리가 특히 강점인 료칸으로 알려져 있다. 료칸 1층의 카페도 호젓하게 휴식을 즐기기 좋은 공간이다. 

▲'하타고 이센' 1층에 있는 카페 내부. 일본 전통 목조건축의 뼈대를 살렸지만, 현대적인 소품과 커피내리는 기구를 사용한 인테리어가 이색적이었다. 

▲▲카페에서 파는 롤케이크와 '사사당고(笹団子·ささだんご)'. 쌀이 유명한 니이가타답게 쌀로 만든 롤케이크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린다. 팥소가 들어간 떡을 댓잎에 싸서 찐 사사당고는 니이가타현의 명물 과자다.  

▲낮시간이라 한적한 료칸에서 온천에 가는 길. 온천장에선 유카타를 입고 식사도 하러가고 목욕도 하러간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 숙소에 들어와 온천욕을 할 준비를 마쳤다. 유카타를 입고 온천으로 가는데 료칸 내부는 한산했다. 역시나 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탕에서 격한 운동으로 지친 팔다리를 달랬다. 하루종일 추위와 격한 운동으로 얼었다 녹길 반복하느라 딱딱하게 굳은 근육이 스르르 풀리는게 느껴졌다. 탕에서 나올 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온몸이 가벼워졌다. 저녁식사는 동해에서 잡은 해산물이 메인이 된 가이세키였다. 전날 코스보다 싱싱함이 느껴지는 요리들이 나아진 느낌이었다. 

▲'쇼센가쿠 카게츠'의 가이세키 요리

방으로 돌아와 눈 덮인 유자와마치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설국' 책을 펼치니,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雪) 위를 달리는 고마코의 모습이 창밖에 그려졌다. 청명하여 슬프도록 아름다운 요코의 목소리도 상상해봤다. 설국의 하루도 저물었다. 별이 하나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마무라처럼 발에 힘을 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이 눈의 고장이 유독 아름다운 건 일상의 공간을 잠시 접어둔 채 떠나온 비현실적 공간이란 전제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되새기는 눈의 고장은 실제 그곳에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 

TIP

-에치고유자와의 호텔과 스키장들을 연결하는 무료 셔틀버스 시간표. 

http://www.minoriya.gr.jp/images/717079_1.pdf

http://www.minoriya.gr.jp/images/717078_02.pdf

-스키장 매표소에서 코스맵을 무료로 나눠준다. 워낙 코스가 많고 복잡해 안전한 스키를 위해선 챙겨두는 게 좋다. 

-에치고유자와역 1층엔 다양한 지역 특산물을 파는 꽤 큰 규모의 쇼핑몰이 있다. 쌀로 만든 과자의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니이가타 쌀로 만든 사케를 시음해 볼 수 있는 폰슈칸도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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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휴가를 떠나기 전엔 생소한 지명인 아키타, 그것도 깊은 산속에 틀어박힌 온천장에 이틀씩이나 머무르는 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완벽히 쉬고싶은 상태로 일상을 떠나온 사람에게 츠루노유는 떠날 때가 다가올 수록 아쉬운 곳이다. 2월 4일, 아키타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야마노야도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 

마지막날 아침은 정성스러운 아침식사로 시작했다. 이로리에 숯불이 타고 있는 식당에 들어서면 잘 다듬은 생선이 접시에 놓여있다. 밥을 먹으면서 할일은 생선이 취향에 맞게 알맞게 구워질 때까지 굽는 일이다. 두부요리와 계란말이, 신선한 산채, 따뜻한 미소시루 같은 아침상이 올라오고 윤기가 흐르는 아키타 쌀밥이 소담스레 담긴 밥그릇이 놓인다. 산속에 있는 숙소라 산마를 사용한 식단이 아침에도 나왔다. 마를 갈아서 생선알을 올린 후 밥에 얹어먹는 음식이었는데, 살짝 짭짤하지만 밥이 뚝딱 없어질만큼 입에 착 붙는 감칠맛이 돌았다. 

▲츠루노유 별관 야마노야도를 떠나기 전.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츠루노유 별관 야마노야도를 떠나기 전.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이틀 동안 오갔던 다자와코역




◀아키타 신칸센과 조에쓰 신칸센을 타고 가는 경로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자와코역에서 오전 9시 12분에 출발하는 도쿄행 신칸센을 타기 위해 서둘렀다. 다자와코를 출발한 신칸센 코마치를 타고 일본 서해안을 따라 모리오카와 센다이를 지나 사이타마현 오오미야(大宮)까지 가서, 죠에쓰 신칸센으로 갈아타고 목적지인 소설 '설국'의 무대 에치고유자와(越後湯沢)까지 가는 4시간 일정이었다. 바로 이날 자그마치 1만9930엔이나 드는 신칸센 표값이 JR동일본패스를 끊은 목적이기도 했다. 




신칸센은 지정석 객차와 자유석 객차가 따로 있지만 도호쿠(아키타) 신칸센 코마치는 전석 지정석으로 운행된다. 따라서 JR패스 소지자도 발권 창구에서 패스를 내밀고, 좌석번호가 찍힌 승차권을 끊어야한다. 물론 패스를 소지했으면 추가요금은 없다. 신칸센으로 장거리 이동할 땐 객차 맨 뒷자리가 명당이다. TGV와 달리 객차와 객차 사이에 따로 짐놓는 칸이 없기 때문에, 머리 위 짐칸에 올려놓을 수 있는 사이즈를 넘어선다면 그 짐을 그대로 좌석 앞에 모시고 타야한다. 뒷자리에 앉으면 좌석 등받이와 벽 사이 공간을 수납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다자와코역에서 발권할 때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맨 뒷자리 발권을 부탁했고, 다행히 역무원 아저씨가 알아들어주신 덕에 짐을 등 뒤에 보관하고 편히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코마치는 다자와코-모리오카-센다이를 지나 우츠노미야까지 곧장 달렸다. 센다이에서 사람들이 꽤 많이 탔는데 얼마 후 지날 후쿠시마에 기차가 설 줄 알았으나, 후쿠시마역은 그냥 지나쳤다. 원전사고가 난 후쿠시마현의 현청소재지인 후쿠시마시가 맞다. 원전이 위치한 바다 쪽이 아니라 내륙을 통과했지만 그래도 찝찝함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다. 후쿠시마현을 지날 땐 외교부에서 경고문자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냥 '카더라'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센다이역에서. 도호쿠 지방의 중심지답게 사람들이 꽤 많이 탔다. 

오전 11시 38분 오오미야역에 도착했다. 아키타와 비교하면 훈풍이 부는 따뜻한 겨울날씨에 잠깐 당황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니이가타현의 도시가 과연 소설 속 '설국' 같을지 걱정이 앞섰다. 오후 12시 18분 죠에쓰 신칸센 MAX타니가와에 올랐다. 죠에쓰 신칸센은 겨울철 한시적으로 에치고유자와역 대신 가라유자와(ガーラ湯沢)역을 신칸센 토키와 타니가와의 종점역으로 운행한다. 후술하겠지만, 가라유자와역은 내리자마자 바로 스키장이다. MAX타니가와는 객차가 2층인데, 평일인데도 수도권에서 니이가타현 스키장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타고 있었다. 

한시간 정도 달리자 열차는 긴 터널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갔다고 직감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눈의 고장에 도착하기 직전. 

군마현과 니이가타현을 가르는 '국경의 긴 터널'은 맞지만, 신칸센을 타고 지나는 터널은 소설 속 그 터널은 아니다. 신칸센을 타면 지나는 다이시미즈(大清水) 터널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미즈(清水)터널은1931년 개통됐다. 길이는 다이시미즈 터널이 22km로 시미즈터널보다 13km가까이 길다. 

터널을 지나기 전 봤던 따뜻한 간토지방의 벌판엔 보리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설국을 찾아가는 여행인데, 때아닌 훈풍과 봄기운을 느끼고 살짝 걱정이 됐다. 터널 너머에 설국이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긴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얀 눈의 고장이었다. 열차는 에치고유자와역에 멈춰섰다. 

에치고유자와역은 스키나 스노우보드 장비를 들고 온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에서 묵을 곳은 역에서 가까운 상점가에 위치한 '쇼센가쿠 카게츠(松泉閣 花月)'란 료칸이었다. 역에서 가깝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도 가까워서 이곳을 택했다. 온천이나 식사에 대한 평도 좋은 편이었다. 

에치고유자와역 서쪽 출구에서 걸어서 5분 정도면 도착하기 때문에 송영버스가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온천물을 뿜어내 눈을 녹이는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있었다. 신발과 캐리어를 버리지 않으려면 송영버스를 예약하는게 편리하다.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료칸의 로비는 넓직하고 정갈하다. 아담하지만 정감있는 야마노야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오카미상의 안내를 받아 로비 한켠에 마련된 게스트룸으로 이동했다. 숙박카드를 작성하고 맛차와 모로코시를 웰컴티로 받았다(너무 달았다). 

▲맛차와 모로코시와 뜨거운 물수건.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오카미상을 대신해 엄마와 나를 담당했다. 숙박카드 작성을 돕고, 카드를 작성한 뒤엔 료칸을 안내하는 책자를 펼쳐놓고 곳곳을 설명했다. 방안으로 가는 동안 꽤 묵직한 캐리어를 양 손에 들고 앞장섰다. 3층에 위치한 방에선 에치고유자와 시내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방안 시설을 설명하고, 온천 이용 규칙에 유카타 입는 법까지 설명하고 직원은 자리를 떴다. 


▲쇼센가쿠 카케츠 료칸의 방안 모습. 

오후 2시쯤 됐는데 점심을 못 먹은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소바집 '나카노야(中野屋)'를 찾아나섰다. 누가봐도 온천마을 같은 분위기가 나는 서쪽과 반대로, 역 동쪽 출구로 나가면 생선가게, 라면집 같은 좀 더 일본 동네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역에서 2분 정도 걸으면 나카노야의 삼각지붕이 보였다. 


 

▲,▲사진=나카노야 홈페이지/에치고유자와에서 첫끼를 먹은 곳. 목요일 휴무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나카노야 안에는 손님이 꽤 많았다. 오전 내내 스키를 즐긴 듯한 젊은 손님들이 한무리 모여 앉아 늦은 점심과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영어 메뉴판을 요청했다. 엄마는 차가운 자루소바, 나는 덴푸라가 들어간 온소바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homemade noodle'을 강조했는데, 허풍은 아닌 듯했다. 메밀향이 진한 진짜 메밀국수가 나왔다. 따뜻한 국물도 좋지만 이런 면은 자루소바로 먹는게 더 나은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게 땡기는 건 여기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자루소바를 시키면 따뜻한 메밀면수를 줬다. 

식사를 한 후엔 마을을 산책하면서 '설국'이 쓰여진 다카한(高半) 료칸에 가보기로 했다. 밥을 먹고 다시 역으로 돌아와 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시내 지도를 받았다. 지도상 거리도 꽤 멀어보였다.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이렇게 말도 안되는 높이의 눈더미가 쌓여있다. 겨우내내 눈을 치우지 않고 이렇게 쌓아놓거나 아예 도로마다 깔려있는 스프링클러로 녹여 흘려버리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쌓아놨는데 눈더미가 무너지지 않는게 용하다 싶었다. 














◀지붕에 눈이 너무 심하게 쌓였다 싶으면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서 눈을 치우기도 했다. 쌓인 눈의 무게 때문에 눈더미는 폭신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딱딱했다. 지붕위에 올라간 일꾼들은 눈을 퍼서 치우는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눈더미를 깨서 조각을 바닥으로 던졌다. 



▲다카한 올라가는 길. 평화로워 보이는 표정이지만 스프링클러로 뿌려대는 물 때문에 어그부츠가 홀딱 젖었다. 양말까지 물기가 배어들어가서 몹시 찝찝했다. 숙소에서 고무장화를 빌려준다고 할 때 모양 빠져도 그냥 신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고무장화를 신고 다니고 있었다.

▲다카한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다카한은 에치고유자와를 굽어보는 언덕길에 위치해있다. 

▲다카한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언덕길을 따라 뜨뜻한 온천물에 녹은 눈이 흘러내렸다. 장화를 신고가지 않으면 올라가기 매우 힘들다. 

 

▲, ▲다카한 앞에서. 

사실 다카한에 묵으려고 예약을 시도했었다. 불행히도 여행 넷째날인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다카한의 모든 방이 만실이었다. 셋째날만 다카한에서 묵을 수도 있었지만, 같은 도시 안에서 방을 옮겨다니는게 내키지 않았다. 결국 다카한을 포기하고 차선책이던 쇼센가쿠 카게츠로 숙소를 잡았지만, 다카한 입구에 들어선 순간 하루라도 묵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로비는 묵직한 느낌을 주는 목재로 장식돼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인테리어는 고마코를 떠올리게 했다. 로비엔 잔잔한 샤미센 연주가 흘렀다. 소설 속 장면이 머릿속에 흘렀다.   

로비에서 관람료 500엔을 내면 2층에 있는 설국 문학관을 둘러볼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육필 원고 등 설국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고, 가와바타가 1935년부터 머물며 '설국'을 집필한 '안개의 방(かすみの間)'을 재현해놓았다. '고마코'의 모델이 된 게이샤 마쓰에(松榮)의 빛바랜 사진과 옷가지도 전시된 채 멀리서 온 방문객을 맞고 있다. 

▲설국 문학관 앞에서.

▲,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물며 '설국'을 집필한 '안개의 방(かすみの間)'. 창문을 열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에치고 산맥이 안길 듯 성큼 다가온다. 해질 무렵 이곳에 오면 삼나무 숲이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한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설경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소설 '설국'은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다카한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리막길은 훨씬 걷기 수월했지만 신발은 그냥 포기했다. 

▲료칸에서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자리마다 놓여있는 이름표에 그날의 가이세키 코스가 적혀있다. 

다카한을 둘러보고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이 료칸도 방안에서 밥을 먹는 대신, 식당에 마련된 지정석에서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식사에 대해선 특별히 쓸 말이 없다.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가이세키 요리가 나왔는데 인상적인 요리는 없었다. 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예쁜 요리들이었다. 이날의 테마는 육류였는지, 바다가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해산물 요리는 코스 초반 사시미 빼고 거의 없었다. 코스 후반부에 나온 쌀밥은 훌륭했다. 아키타와 더불어 일본의 2대 쌀 산지라는 니이가타의 고시히카리 쌀로 솜씨 좋게 지어낸 밥이었다.  

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유카타로 갈아입고 온천욕을 할 준비를 마쳤다. 유카타에 외투, 양말까지 풀세트로 갖춰놨는데 이날 처음 본 기모노용 양말이 아주 유머러스했다. 벙어리 장갑의 양말버전이랄까. 엄지발가락만 따로 나오게 만들어진 벙어리양말이었는데, 게다를 신기 위해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벙어리 양말(?)

▲온천에 가기 전, 유카타를 입고

온천시설은 츠루노유 온천에 비해 훨씬 편리했다. 운치는 덜했지만, 샤워시설이나 탈의실 등 편의시설은 훨씬 잘 갖춰놨다. 편백나무로 만든 실내탕과 돌을 쌓아 만든 노천탕은 인공적으로나마 훌륭하게 꾸며놓은 온천이었다. 내 취향엔 산 속에서 솟아나는 원천 그대로의 모습에 가림막만 두른 츠루노유 온천이 더 맞았지만, 이 료칸의 온천은 잘 다듬은 바위와 나무와 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유황성분이 들어있는 츠루노유와는 달리 약알칼리성 단순 온천수라 온천물을 좀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점도 장점이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방안에 놓여있는 텔레비전이 눈에 띄였다. 사흘만에 처음 보는 텔레비전이었다. TV 전원을 켜니 영어, 중국어, 심지어 한국어 채널까지 나오는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 츠루노유 온천을 벗어나면서 잘 터지던 휴대전화 신호와 3G는 물론, 이 료칸에선 객실에서도 WiFi를 여유롭게 쓸 수 있었다. 훨씬 편리했지만 쉬는덴 불편했다. 전날까지의 환경보다 좀 더 익숙한 환경에 돌아왔지만, 기쁘고 편리하다는 느낌보다는 불편함이 그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신호 같아서 기분이 떨떠름했다. 휴가가 벌써 절반 넘게 지나가 있었다. 


TIP

-위에도 썼지만, 신칸센 코마치는 전석 지정석으로 운행된다. JR패스 소지자도 좌석이 지정된 표를 새로 발권해야 한다. 패스를 내밀고 발권하면 추가요금은 없다. 

-부피가 큰 짐을 갖고 신칸센을 탈 땐 발권시 객차 맨 뒷자리 표를 달라고 하자. 짐을 놓을 공간이 있다. 

-에치고유자와의 료칸들에선 스키장비도 빌려준다. JR에서 운영하는 가라유자와스키장을 이용할 경우 JR패스를 이용한 할인가격이 더 쌀 때도 있으니, 가격 비교 잘 해볼 것. 스키 리프트권과 료칸 숙박권을 연계한 숙박상품도 있다.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다. 눈을 녹이기 위해 물을 뿌려대기 때문에 거리가 온통 물바다인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장화를 빌려준다고 하면 모양 빠지는 걱정을 하기 전에 감사하며 빌리는 게 낫다. 신발 버리기 딱 좋다.

-에치고유자와는 온천 인심이 후하다. 곳곳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족탕(足湯)과 수탕(手湯)은 물론, 무료 대중탕도 있다. 역 앞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지도엔 대중탕과 족탕의 위치도 표시돼 있다. 

-에치고유자와의 료칸들에서 굳이 조석식을 다 해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시내 곳곳에 맛집이 많다. 나카노야(소바), 심바시(소바), 닌진테이(돈까스), 오오스시(스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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