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지나서 주절주절 쓰는 덩케르크 후기
/덩케르크 포스터
1. 용산CGV 아이맥스
-지난 주말, 그러니깐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무려 심야영화로 덩케르크를 봤다. 재개장한 용산CGV에서 아이맥스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무려 예매 전쟁을 감수했다. 당연히 몰릴 거 같긴했는데 600석이 넘는 규모를 생각해 여유를 부렸더니, 가운데 블럭은 맨 앞자리까지 꽉꽉 들어찼다. 새벽 1시반 영화를 예매하는데도 그랬다.
-자리는 F열 오른쪽 약간 사이드쯤이었다. 사이드라는 점이 좀 아쉬웠지만, 아이맥스를 꽉 차게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쯤 거리도 괜찮은 것 같다. 딱히 목이 아프거나 자막을 보는데 애를 먹진 않았다. 화면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만큼 화면과 사운드가 주는 압도감은 굉장했다. 전투기 시점으로 진행되는 장면에서 하늘로 올라가거나 바다로 내려꽂힐 때 약간 울렁거린다.
2. '영화' 덩케르크(약스포 있음)
-이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지를 찢고 피를 흩뿌리거나, 전우애를 부각시키기 위해 눈물을 짜내지 않았다. 거대한 화면을 가득채운 황폐함과 그 속에서 무력한 개인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전쟁영화'에서 쉽게 떠올리는 피가 낭자한 장면보다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종류의 참혹함이었다.
-이 영화에 '(영)국뽕'적 요소가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덩케르크에 잔류하는 볼튼 중령, 귀향 열차에서 토미와 알렉스가 읽는 연설문, 파리어의 마지막 씬 등등. 비교적 전형적인 종류의 '국뽕'이 차오르는 장면인 것 같다. 그러나 더 소소한데 임팩트 있는 장면은 도슨 선장의 "We have a job to do", 맹인 노인의 "Well done" 같은 대사들이었다.
3. 자막(여기도 스포 있음)
-영화 중반쯤부터 자막 보는걸 포기했다. 사실 대사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크게 볼 필요도 없긴 했지만, 영화의 디테일 감상을 해칠만큼 자막에 문제가 있었다.
-가장 의아했던 번역은 'Home'에서 나왔다. 영화의 메인 홍보 카피는 "When 400,000 men couldn't get home, home came for them"이었다. 이 home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여러번 나온다. 침몰하는 어선에서 탈출해 문스톤호에 가까스로 구조된 토미는 갑판에 눕자마자 "Take me home" 이라고 말한다. 문스톤호에 구출된 육군 소위는 도슨 선장에게 배를 돌릴 것을 종용하며 "We should be at home"이라고 말한다. home이 제일 묵직하게 다가온 장면은 위넌트 대령과 볼튼 중령의 대화 장면 두개다.
Commander Bolton: You can practically see it from here.
Colonel Winnant: What?
Commander Bolton: (쌍안경으로 먼바다를 바라보며) Home.
Colonel Winnant : What do you see?
Commander Bolton : Home.
처음 대화에서는 바다만 건너면 가까이에 Home이 있다는 맥락으로, 두번째 대화에서는 구출작전에 나선 작은 배들을 보고 Home이란 표현이 쓰였다. 한국어 자막은 두 대화에서 모두 볼튼 중령이 말한 Home을 '조국'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여기에 호응하기 위해서인지, 홍보 카피 또한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가 됐다.
한국어의 '조국'이라는 단어가 뿜어내는 뉘앙스를 감안하면, 과연 적절한 번역이었나 싶다. 이 장면에서 볼튼 중령이 본 것은 통통배, 어선, 귀족의 요트 등등. 그리고 배를 몰고 온 이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도슨 부자와 조지였는데, 도슨 선장은 큰아들을 전쟁 초기에 잃었고 그 아들뻘 젊은이들을 구출하러 온 민간인이었다. 배에 오른 병사들은 take me home 이라고 갈망하면서도 그들의 home이 패잔병인 자신들을 냉대하진 않을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들이 기차에서 내려 맞닥뜨린 첫 home의 모습은 well done이라고 격려하는 맹인 노인이었다. '조국'이라는 거대하고 국가주의적인 단어로 이들을 규정하는게 과연 잘 어울리는 번역일까. home이라는 단어가 여러차례 나오고, 볼튼 중령의 대사에 Britain이나 homeland 같은 누가 들어도 '조국'이라는 단어 대신 home이라는 포근한 표현이 쓰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최소한 '국가'가 그들을 구한게 아니라 그들을 구하러 온 존재들이 토미나 구조된 병사가 말하던 home과 뗄 수 없는 대상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토미나 구조된 병사가 과연 home이라는 단어를 통해 '조국'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공개된 트레일러를 참고해 여러 나라(주로 로망스어권)에서 이 장면(볼튼-위넌트의 첫번째 대화)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도 찾아보았다.
먼저 프랑스판 예고편에서 home은 la patrie로 번역됐다. 이건 거의 한국어 '조국'에 대응된다고 말할 수도 있는 번역이다. 같은 불어권이지만 불어권캐나다판에선 'notre pay'라고 번역됐다. 이건 조국보다는 약한 모국, 고국, 고향 쯤 될 것 같은 표현이다. 국가관적 색채가 좀 약해진 느낌. 이탈리아판도 여기에 거의 1:1 대응되는 la nostra terra라는 표현을 썼다. 반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각각 nuestra hogar와 Casa라는 표현을 썼다. nuestra는 our에 해당하는 소유격이고 hogar와 casa는 집, 보금자리에 가까운 표현이다. 흥미롭게도 일본판은 "祖国を"라고 번역했다.
로망스어권에서도 이 대사의 번역은 많이 갈렸다. patrie 혹은 조국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른 표현들이 영화 전체의 주제와 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호크다운'이 아니닌깐.
-논란의 여지가 있는 'home'을 빼고도 이 영화의 자막은 분명 문제가 있다. 위넌트 대령(육군)과 볼튼 중령(해군)이 투샷으로 많이 나오는데, 볼튼 중령이 위넌트 대령에게 '자네'라고 하대를 한다. 크레딧에도 Colonel Winnant와 Commander Bolton이라고 분명히 나오는데 저렇게 말투를 막 번역한건 대체 왤까. 자막의 말투와 볼튼 중령의 액면가를 보고 나는 영화가 진행되는 한참 동안 그가 제독쯤 되는 줄 알았다. 실제 제독이 영화 초반에 한번 나오는데 볼튼 중령이 "Admiral"이라고 그를 맞자, 제독이 "Commander"하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자막이 '제독님' '사령관'으로 달렸다. commander에 지휘관이나 사령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볼튼의 계급장은 금색줄 세개인 중령의 계급장이다. 따라서 영화 내내 해군 중령인 볼튼이 육군 대령 위넌트에게 쿨하게 말을 놓은 것은 오역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두번 정도 프랑스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초반에 도망치는 토미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쏘는데 토미가 뭐라뭐라(anglais! anglais!) 외치니깐 사격을 중단한다. 후반부에 깁슨에게 병사들이 총을 겨누는데 그때도 깁슨이 뭐라뭐라(Francais, je suis francais) 외친다. 흐름상 번역을 해줘야 매끄럽게 넘어가는 장면일 것 같다.
자막의 아쉬움을 빼고 덩케르크는 근래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담백한 화법으로 그려낸 전쟁의 황폐함, 시청각적 즐거움, home이라는 대사의 느낌 등등. 이 영화를 보는데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많다. 약간 낯선 전쟁영화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피바다 속에서 짜내는 감동코드에 지쳐 전쟁영화라는 장르에 물려버렸던지라 그마저도 신선했다. 개봉한지 얼마나 됐다고 모 국산 영화 때문에 상영관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데, 내리기 전에 내일 한번 더 볼 예정이다.
덧. 이 영화를 28일 같은 극장 같은 상영관 M22번(뒤에서 세번째줄 한가운데)에서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여유롭게 즐기기 좋은 자리였고, 그래서인지 놓쳤던 것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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