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지 한달만에 남기는 신혼여행 후기 3-팔레르모&체팔루>
팔라티나 예배당을 나와 호텔에서 짐을 찾았다. 택시를 타고 팔레르모 항구로 갔다. 항구 근처로 가니 덩치 큰 차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혹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짐을 싣고 오가는 화물 트럭들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4차선 정도 되는 신호등 없는 도로를 건너 AVIS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보통 험난한게 아니었다. 이 자그마한 길에서 시칠리아인의 운전 습성을 제대로 체험했다. 크락션과 하이빔과 무깜빡이 끼어들기 등등… 그나마 다행인건 일단 사람이 들이대면 차가 서긴 선다. 뭐라고 욕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못 알아들으니 노상관.
AVIS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차를 픽업하러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선 아까 그 길을 다시 건너야했다. 그래도 두번째 건너는 길이라고 좀 더 대범하게 발걸음을 내딛었으나, 그래도 쫄긴 쫄았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엔진 소리와 클락션 소리가 뒤섞인 항구의 도로는 어지러웠다. 사무실 직원이 차량 픽업 장소를 알려줬는데, 한번에 못 찾아가고 빙빙 돌면서 헤맸다. 사무실에 다시 찾아가서 물어봤는데도, 못찾아서 항구에서 일하는 아재들한테 길을 물었다. 어차피 단어가 많이 들어갈 수록 못 알아들을 가능성은 높아지니깐, “where is AVIS” “Dove AVIS” 딱 이렇게만 외쳤다. 아 그전에 “Parli inglese?”를 물어보긴했다.
문제는 영어를 못하는 아재들도 흔쾌히 “Si!!”를 외치셨다는 것. 아재는 엄청 빠른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나는 영어로 더듬거리고… 의사소통이 될리가 없다. 손짓발짓으로 왼쪽 오른쪽 느낌적인 느낌을 이해하는 중에 아재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지나가는 다른 아저씨를 불렀다. 이 아저씨는 ‘잉글레제’가 좀 된다는 것 같았다. 잉글레제가 좀 되는 그 아저씨는 그래도 손짓발짓 시니스트라 데스트라 대신 레프트 라이트라고 말이 통하는 분이라 그 덕인지 한참만에 AVIS 간판을 발견하고 차를 찾았다.시칠리아의 좁은 길에 딱이라는 도요타 야리스를 몰고 팔레르모 시내를 빠져나갔다. 아까 건너면서 기겁했던 그 4차선 도로를 빠져나가는게 좀 헬이었던걸 빼곤, 모든게 무난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구글을 찬양하게 됐는데, 그 계기가 바로 길치 둘을 구원해준 구글네비님이시다. 유럽 렌트카 여행 다녀온 사람마다 구글네비 타령을 하길래 대체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네비를 켜자마자 아이나비 따위보다 훨씬 정확한 도로정보를 ‘한국말’로 알려줬다. 아무튼 구글네비를 따라 거의 안 헤매고(구글네비 달고도 헤맨 적은 있는데 대부분 구글네비가 2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는데 멍때리다가 지나친 것). 아,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이탈리아 차에는 선팅이 된 차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강렬한 직사광선이 내리쬘 땐 얼굴과 상반신이 함께 이글이글탄다. 좋은 점(?)도 있는데 룸미러로 뒷차 운전자 표정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눈치를 주면 알아듣기 쉽다는 말이다. 어쩌다 옆차랑 시비가 붙으면 문을 내리고 어차피 운전자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욕을 하는 대신, 안면근육을 놀려 빡침을 표현할 수 있다.
▲시칠리아 도로를 달리다가
팔레르모 도심을 벗어나자 평화로운 시골 벌판 사이로 쭉 뻗은 도로가 나타났다. 체팔루로 가기 위해선 시칠리아 북서쪽 해안도로를 거쳐야했다. 오른쪽으로 새파란 코발트 블루의 바다가 보이는 길을 한시간 정도 달려 Cefalù라는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산에 만든 성벽 아래로 빨간 지붕 건물과 우뚝 솟은 교회의 종탑이 보이는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이정표를 읽지 않아도 그곳이 체팔루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
체팔루는 산이라고 하기엔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엔 높은 작은 산등성이에 자리한 마을이다.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는데 해안선은 산쪽으로 움푹 들어간 U자 모양이다. 그 해안선에서 시작된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산 위에 남아있는 로까(rocca 요새) 입구까지 닿는다. 급경사가 시작되는 어귀에 기차역이 있었다. 구도심 한가운데는 이탈리아 운전할 때 최고 짜증나는 ZTL 적용구역이었으므로, 아예 접근할 생각을 접고 기차역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해안가와 로까를 잇는 길. 체팔루. Cefalù
해안가로 내려갔다. 마을이 감싸 안은 해안선에는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랬고, 바다는 그보다 더 새파랬다. 아주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바닷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장면을 머릿속에 재생할 수 있었다. 영화를 찍었던 1980년대나 지금이나 체팔루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들쑥날쑥한 네모 건물들이 영화에서보다 아주 조금 더 낡아보일 뿐이었다. 비수기라 조용한 해변엔 간식을 들고 소풍을 나온 동네사람들만 삼삼오오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해변. 여기 어디에선가 '시네마 천국'을 촬영했다. 어차피 물에 안들어가는 사람에겐 비수기 바닷가가 훨씬 좋다. 체팔루. Cefalù
해안가에서 시작된 골목으로 들어가자, 노랗고 네모난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레스토랑을 찾아봤는데 5위권 안쪽에 들어가 있는 집들은 비수기라 그런가 문을 닫았거나, 동선을 고려했을 때 찾아가기에 영 적절하지 않은 곳이었다. ‘1등 아니면 싫다’던 박 기자도 배가 고팠는지 조용해졌다. 할 수 없이(…) 무려 트립어드바이저 6등에 오른 ‘Locanda del Marinaio’에 가기로 했다. 와인저장고처럼 둥근 천장의 레스토랑이었다. 배가 너무 고프던 차라 메뉴판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해산물파스타와 대구살라비올리를 주문했다.
▲Locanda del Marinaio의 파스타들. 둘다 맛있었지만, 특히나 해산물 파스타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재료로 대단한 맛을 냈다.
이 집은 식전빵부터가 인상적이었다. 겉은 거칠고 속은 보들보들한 빵이었는데 향이 진한 올리브유에 찍어먹는게 어찌나 맛있던지… 원래 이탈리안 레스토랑 가면 식전빵 잘 안먹는데 순식간에 빵 한접시가 뚝딱 없어졌다. 조금 기다리다보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해산물 파스타는 인생파스타였다. 이렇게 평범한 메뉴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놀랍다. 딱히 뭐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은 오일베이스 파스타였는데, 신선한 재료를 도대체 어떻게 익힌건지 연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이 최고였다. 면에도 해산물의 맛이 깊게 배어 밀가루 면만 씹어도 심심하지 않았고, 생면을 딱 적당한 정도로 쫄깃하게 익었다. 한접시가 사라지는게 아까울 정도로 최고의 파스타였다. 다음에 시칠리아에 간다면 이 파스타를 다시 먹기 위해 체팔루를 갈 용의가 있다.
박기자가 시킨 대구살 라비올리도 한국에서 못본 음식인데, 해산물 파스타만큼의 임팩트는 아니지만, 신선한 재료를 솜씨좋게 요리한 디쉬였다. 꽉 채운 대구살이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탱글거려서 조금 놀랐고, 라비올리피도 딱 적당히 익어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점심을 먹고 체팔루 거리를 걸었다. 두오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서있는 팻말을 읽지 않아도, 가장 우뚝 솟은 종탑을 찾으면 되니깐. 하긴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에서 ‘모든 길은 두오모로 통한다’.
체팔루 두오모는 이제 조금 봤다고 익숙해진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규모는 몬레알레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것 같지만(몬레알레를 안갔으니) 내부 모자이크가 팔라티나 예배당이나 몬레알레 대성당과 비슷한 스타일로 매우 아름답다고 했다. 음… 근데 성당이 닫혀있었다.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데 아그리젠토로 가야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할 수 없이 두오모 광장의 조그마한 젤라또집에서 젤라또를 사들고 먹으면서 두오모 외관이나 감상하기로 했다.
▲조그맣지만 포스는 작지 않았던 체팔루의 두오모. Duomo di Cefalù
겨울 유럽여행의 안좋은 점이, 길에서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 먹기 어렵다는 점이다. 4년 전 파리에서 베르티용 아이스크림 테이크아웃해서 먹으려다가 이가 시려 죽을 뻔했었다. 2월에 벚꽃이 만개하는 시칠리아에서는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피스타치오, 초콜릿 같은 평범한 맛 아이스크림을 사서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고터 파미에스테이션에 있는 ‘젤라X젤X띠’라는 젤라또집을 굉장히 좋아하는데도 하나에 4000원이 넘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자주 못가고 있다. 진한 피스타치오맛, 초콜릿맛 아이스크림이 두가지맛에 2유로도 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양은 훨씬 더 많다. 본토의 위엄이라고 넘기기엔 한국에서 젤라또 사먹으면 손해보는 느낌을 넘어 눈탱이 맞는 느낌인걸 지울 수 없다.
막상 팔라티나 예배당에서는 내부 모자이크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외관을 볼 정신은 없었던 것 같다.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핥아먹으며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두오모를 눈에 담았다. 이탈리아를 여러번 왔지만 각 도시를 대표하는 두오모는
제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도 외관이 색다른 시칠리아의 두오모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양파모양 창문, 늘어선 기둥과
아치, 미나레트를 닮은 종탑. 이렇게 생긴 건물들이 서서히 눈에 익어갈 때쯤 아그리젠토로 떠났다. 체팔루에서 아그리젠토까지는 차로
두시간 반 남짓 걸리는 거리. 그러나 마치 다른 나라에 간듯 또 완전히 다른 첫인상으로 성큼 다가왔다.
▲아마도 바오밥 나무일 것이라 생각하고 사진을 찍었다. 가로수로 바오밥나무라니! 아그리젠토 가는 길
▲'신들의 도시' 아그리젠토로 가는 길. 펼쳐지던 벌판에서 갑자기 신전이 튀어나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계속>
'at the turnstile > 나라 밖'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winter/Again Akita (2) | 2018.03.03 |
---|---|
2017/winter/Sicilia∙Toscana∙Umbria, Italia/Honeymoon <1> (0) | 2017.03.29 |
2017/winter/Sicilia∙Toscana∙Umbria, Italia/Honeymoon/Prologue (0) | 2017.03.21 |
2015/autumn/Japan Alps, Kamikochi/Day 2 (0) | 2016.01.26 |
2015/autumn/Nagoya, Japan Alps, Gero/Day 1 (0) | 2016.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