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개항한 후 메이지 시대에 3000m가 넘는 중부 산속 깊은 오지까지 들어온 영국인이 있었다. 알프스에 아마도 가봤을 그는 근육질 산들로 둘러싸인 이 고장에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 중부의 히다, 기소, 아카이시 산맥은 '일본 알프스'가 됐다. 가미코지가 위치한 히다산맥은 알프스 산맥의 북쪽 부분이라 '北 アルプス(키타 아루푸스)'라고 부른다.
중부 산악지대 여행의 거점인 다카야마(高山)에서도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는 깊은 산속에 가미코지가 있다. 애초에 이번 일본 여행을 계획한 근간은 가미코지(上高地)였다. 上高地. 어딘가의 위에 있는 고지대라는 뜻일까. 높은 곳에 있으니 붙인 이름이겠지. 공기와 물이 맑을 것 같은 이름이다.
다카야마에서 가미코지로 향하는 첫번째 버스에 올랐다. 가미코지란 이름에 대한 생각들을 계속 되뇌었다. 일본어를 모르니깐 저걸 가미코지라고 읽는지, '상고지'를 일본어로 가미코지라고 읽는지조차
몰랐다. 문득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때 일본어를 모르는 친구 E와 도쿄에 갔던 게 생각났다. 둘 다 한자도 제대로 못읽어서
지명을 읽을 땐 '신O'처럼 한두 글자를 빼먹고 찾았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가 소스라쳤다. 그닥 크지 않은 버스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로 닦인 좁고 굽이치는 길을 마치 곡예하듯 달렸다. 버스 안내방송이 다이쇼연못(다이쇼이케∙大正池)을 알릴 때 벨을 눌렀다. 사람들이 제법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그냥 사람들을 쫓아가도 되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잘 보이는 화살표를 따라가도 된다. 잠시 언덕길을 내려오는 듯하더니 어느새 눈 앞에 거울처럼 맑은 호수가 펼쳐진다.
연못에 붙은 '다이쇼'라는 이름은 연호에서 왔다. 다이쇼 4년(1915년) 야케다케(焼岳)산이 분화하면서
쏟아진 토사가 이 일대를 흐르던 아즈사강을 막아버리면서 연못이 생긴 데서 따온 것이다. 바람이 잔잔할 땐 이 연못을 만든
야케다케 산이 거울처럼 잔잔한 연못 위에 비친다는데, 이날은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그런 장관을 보진 못했다. 연못 곳곳엔 물에 잠겨 고사한 나무의 밑둥이 표지석처럼 남아 이 곳이 원래 울창한 숲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물은 정말 신비스러울만치 맑다. 떠다니는 부유물조차 없는데, 장엄한 고산이 펼쳐진 배경과 박혀있는 고사목이 어울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연못 주변 양지바른 곳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불과 100년 전 이 절경이 만들어진 드라마틱한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표지판을 따라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야생동물의 흔적이 종종 보인다. 가장 흠칫 놀라는 건 '곰조심'이다. 몇월 며칠 몇시에 곰을 봤다는 구체적인 목격 기록을 붙여놓는데, 막연한 걱정이 현실적인 긴장감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마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 이 산책로를 걷다보면 곰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햇살 좋은 어느 오후 갑자기 곰이 나타나기엔 가미코지 산책로는 너무 개방된 공간이었다. 낙엽송이 쭉 뻗은 숲 사이로 나 있는 오솔길은 수정처럼 맑은 강물을 따라가기도 하고, 강물을 이어지기도 했다. 오솔길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서 가던 일본인 부부가 탄성을 질렀다. 길 바로 옆 나무에서 움직이는 뭔가가 보였다. 얼굴이 빨간 일본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앉아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바로 옆 빨간 열매가 열린 나무엔 원숭이 두마리가 가지를 타고 다니며 나무 열매를 입에 넣기 바빴다. 사람을 겁내지도, 의식하며 접근하지도 않았다. 때묻지 않은 원숭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다이쇼이케부터 시작하는 가미코지 초입은 10월 하순에 이미 낙엽이 진 상태였다. 시기를 잘못 택한 것인가 고민이 되던 찰나에 갑자기 시야가 금빛으로 가득 찼다. 쭉뻗은 금빛 낙엽송 군락이 강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세가지 색깔 뿐이었다. 파란 하늘, 아직 초록빛이 진한 고산, 낙엽송과 억새의 금빛. 정해진 산책로를 포기하고 물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강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강변 자갈을 밟으며 낙엽송과 강물을 따라 걸었다. 붉고 노란 원색이 아니라 햇살을 받아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종류의 가을 나무를 지금껏 보지 못했다. 뼈대를 드러내기 시작한 가을산이 앙상해지기 직전, 거센 비바람이 한번 불어 한 해 나뭇잎의 수명을 끝내버리기 직전, 마치 봄여름의 햇살을 다 빨아들여 발산하는 듯한 금빛은 어딘가 슬펐다.
아즈사 강변을 걸을 땐 자갈 밟는 소리와 강물 흐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강물이 흘러오는 곳을 향해 계속 걷다보면 갑자기 사람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보였다. 하이킹 코스의 종착점인 '갓파바시(河童橋)'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들 틈바구니에서 갓파바시 한가운데에 선다. 강물이 시작되는 방향을 바라본다. 고개를 들면 3000m가 넘는 준봉들이 병풍처럼 시야를 가득 채운다. 잔잔한 풍경을 늦가을 산바람이 깨울 때까지 그 곳에 서 있었다.
TIP)
-게로에서 가미코지가 있는 북알프스 지역으로 바로 가는 대중교통편은 없다. 북알프스 관광의 중심 도시인 다카야마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시 중간에 버스를 한번 더 갈아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다. 유노시마칸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8시 반쯤 역까지 가는 송영버스 편으로 게로역까지 갔다. 게로역에선 어제 사둔 '히다지 프리깃푸'를
꺼내야할 때다. 도통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적혀있는 기차표가 몇장 있어서 기차를 탈 때마다 역무원에게 그 '몇장'을 다
보여줬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카에리(かえり)'
라고 적혀있는 티켓만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게로역에서 오전 9시 19분에 출발하는 다카야마 행 기차를 탔다. 도착한 기차도
'와이드뷰 히다'였다. 자유석 객차로 들어가서 적당히 차체가 창문을 가리지 않는 자리를 잡고 앉으면 된다. 잠깐 눈을 붙이고
있으면 기차는 50분 만에 다카야마에 도착했다.
-다카야마역에 내려서 출구로 나가면 바로 왼쪽에 '다카야마 노히 버스센터'가 있다. 다카야마에서 북알프스 지역, 가나자와, 마츠모토 등
근처를 오가는 버스 노선의 발착지였다. 한층짜리 작은 버스센터 건물은 외국인과 일본인이 섞여 몹시 붐볐다. 바로 멍때리고 버스를
기다릴 뻔했는데,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종이 팜플렛 같은 걸 들고다니는게 보였다. 노히버스센터 안 인포메이션에 갔더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었다. 물어보니깐 '카에리'를 들고 버스에 타면 안되고, 버스를 사흘간 탈 수 있는 승차권을 따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친절한 직원은 탑승권을 교환할 줄까지 데려다 줬다.
-그렇게 받은 승차권이 바로 이거다. 헤이세이 '27년' 10월 29일까지 유효하다는 스탬프를 찍어주고 안쪽을 펼치면 버스로 갈 수 있는 지역도 표시해놨다. 승차권을 교환하고 대합실 안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샀더니 금방 10시 40분이 됐다. 가미코지로 가기 위해 먼저 거쳐야 할 '히라유(平湯) 온천'까지 갈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다. 히라유/신호타카 선 버스는 히라유 온천과 후쿠지 온천 등 북알프스 지역의 산속 온천 지대를 지나서 신호타카 로프웨이까지 간다. 다음날 신호타카 로프웨이를 타러가기 위해서도 다시 타야할 버스였다. 산악 지대 관광을 책임지는 버스 노선이라 그런지, 버스는 거의 꽉 찼다. 그중 2/3 정도는 외국인.
-중간에 작은 정류장 몇개를 지나쳤던 것 같은데 정말 칼같이 11시 23분에 버스는 '히라유 온천' 터미널에 도착했다. 제법 구색을 갖춘 식당과 스낵코너와 기념품점을 갖춘 건물 앞에 버스가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건물 한 구석으로 가서 가미코지로 가는 버스 승차권을 사야한다. 불행히도 '히다지 프리 깃푸'는 가미코지선까진 커버해주지 않았다. '히다지'를 낸다고 따로 할인 같은 건 없고 짤없이 2000엔(왕복)을 낸다. 히라유 온천에서 가미코지까지 가는 버스는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간식으로 요기를 한 뒤 정확히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여기서 또 20분 정도 가야 가미코지에 도착한다. 가미코지에서 내릴만한 정류장은 세곳이 있다. 다이쇼연못(다이쇼이케∙大正池)/데이코쿠호텔/가미코지 터미널 순서.
-히라유 터미널에서 버스 티켓을 사고 5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터미널을 휘휘 둘러보면 '규망(牛まん)'을
파는 간식 코너가 보인다. 이 지방의 특산물인 '히다규(飛騨牛)'를 넣은 중국식 만두인데, 찐빵만한 크기의 밀가루 찐빵과 만두
사이 그 무언가에 간장 양념을 한 쇠고기가 들어있다. 420엔이라 찐빵치곤 비싸지만, 나름 쇠고기 찐빵이니깐. 이 터미널에선 히다규 조각을 끼운 '소꼬치'도 판다. 900엔 정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벼르다가 돌아오는 길에 맛을 봤다. 주문을 하면 할아버지가 직접 고기를 굽기 시작하는데 고기 굽는 냄새값이 한 200엔 정도. 식욕이 폭발하는 냄새다. 한 15분 정도 후에 완성되는 꼬치맛은... 카메라 초점을 잃게할 맛이다. 비싸지만 맛있다.
-가미코지를 둘러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이쇼이케 정류장에서 내려 갓파바시까지 걷는 하이킹 코스를 택했다. 2시간 좀 넘게 걸렸는데 중간에 쉬면 더 걸릴 수도. 갓파바시에서 5분 거리에 가미코지 버스 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에서도 매 정각과 30분에 히라유 온천까지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가미코지 데이코쿠 호텔은 일본에서 꽤 이름난 '데이코쿠 호텔' 체인이다. 호화스러운 숙박시설에서 '숙도락'을 즐기려면 이곳에 하루 묵는 것도 좋다. 단, 가미코지 입장이 제한되는 11월부터 4월까지는 호텔도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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