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7.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실내악 공연을 좋아한다. 귀가 좋지 않아서 교향악에선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들으려면 일부러 들으려고 골똘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내악은 아니다. 아늑한 공연장, 단촐한 편성, 그래서 그런가 뭔가 연주자들끼리 왠만한 신뢰가 아니면 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오는 신뢰 등등. 실내악을 편애할 이유는 많다.

그럼에도 이 공연을 갈 수 있을지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워낙 오래전에 어렵게 예매한 공연이기도 하고 당분간 테츨라프를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반도를 쓸고 간 태풍과 세종문화회관까지 로비까지 들이닥친 태극기부대를 뚫고 갔다왔다.​




1부 첫번째 곡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4번은 별로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아니었다. 1월 테츨라프 연주를 듣고 이번 공연 레퍼토리를 보면서 사실 제일 기대 안 됐던게 베토벤인데, 뭔가 베토벤 곡에는 테츨라프스러움을 끼얹을 만한 틈이 없을 것 같달까. 미스가 나는데도 그를 듣는덴 또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깐. 아무튼 베토벤은 그냥 무난했다.

두번째 곡인 프랑크 소나타는 눈이 번쩍 뜨였다. 1악장까진 아직 몸이 덜 풀렸는지 약간 단조로웠는데, 2악장부터 지난 1월 성공회성당 공연에서의 피리부는 사나이가 떠올랐다. 굉장히 야성적인 훅이 있다. 3악장의 속삭이는 듯한 레치타티보에서 피아노와 밀당을 하다가 다시 격정적인 패시지로 넘어가는 내내 눈과 귀가 함께 시원시원해지는 보잉 또한 홀리는데 한몫한 것 같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조곤조곤하게, 서정적으로, 때로는 격정적으로 주고받는 캐논으로 진행되는 4악장은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밀당을 밝은 선율로 행복하게 마무리 지으며 끝났다. 분명 조촐한(?) 실내악 무대였는데, 러닝타임내내 굉장히 다이나믹하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한편 본 느낌이었다. 테츨라프는 미스가 좀 있었지만 원래 그럼에도 미스가 난지 긴가민가하게 만들만큼 사람을 홀려놓는게 테츨라프 스타일이고, 반주자도 피아노 비중이 큰 곡을 매우 잘 소화했다.



2부는 수크의 피아노 5중주. 매우 생소한 곡이었고, 먹고 살기 바빠서 예습도 못하고 가서 이번에 무대에서 처음 들은 곡이라 뭐라 감상을 적기도 애매하다. 3악장은 피아노가 주인공이었고 1부 반주였던 피아니스트 키벨리 되르켄이 존재감이 확 두드러질만큼 좋았고, 4악장이 화려하고 격정적이었다는 직관적인 감상 정도?

서울시향 올해의 아티스트인 테츨라프의 아마 마지막 공연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1월 공연만큼 강렬한 충격을 받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공연이었다. 베토벤보다는 프랑크소나타가 굉장히 재미있는, 테츨라프니깐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들었다 놓는 스웩이 있는 연주였고, 수크 5중주는 전혀 모르는 곡이라 걱정을 좀 했지만 이 곡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매력은 충분한 연주였다.

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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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날 R석 티켓 한장 취소해 준 분께 감사드리며>

6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의 공연에 다녀왔다. 10-11일 공연은 알았는데 이 공연의 존재는 너무 늦게 알았고, 존재를 알았을 땐 이미 IBK체임버홀 좌석은 모조리 매진된 후라 마침 개강도 했고 하니 곱게 마음을 접으려고 했었다.
공연 전날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밤중에 예당 홈피에 들어갔더니 R석 가운데 블록 13열에 괜찮은 좌석이 딱 한장 비어있었다. 바로 겟.

사실 이안 보스트리지를 한창 좋아하던 것은 한참 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초반까지 독일 가곡을 아주 열심히 들을 때가 있었는데, 이안 보스트리지가 부른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가 명반이라는 추천을 받고 앨범을 무려 아마존에서 사서 들어본 뒤부터 좋아하게 되었다. ‘물방앗간’이나 ‘시인의 사랑’ 같은 서정적인 레퍼토리가 대표적으로 좋지만, Der Zwerg나 마왕 같은 무시무시한 곡도 소름끼치게 소화해서 후자 쪽을 더 좋아한다. 리트를 부르는 테너 중에선 분덜리히 다음으로 많이 들은 듯.



어쨌든 그렇게 갑자기 공연에 가게 되어 별 준비 없이 공연장에 갔다. 레퍼토리는 슈베르트 연가곡 ‘Schwanengesang(백조의 노래) 중 세곡, 베토벤의 연가곡 An die Ferne Geliebte(멀리있는 연인에게), 슈베르트 가곡 Auf dem Strom, 말러의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본 윌리엄스의 On Wenlock Edge(웬로크 벼랑에서). Auf dem Strom은 피아노-호른 편성으로, 말러는 하프와 관악이 들어간 실내악 편성으로, 본 윌리엄스는 현악과 피아노 반주로 불렀다.

사실 처음 슈베르트 세 곡은 무난했지만 컨디션이 안 좋아보여서 기대보다는 살짝 실망이었다. 그러나 곧 시작된 베토벤의 An die ferne Geliebte는 정말 좋았다. 뒤로 갈수록 가수 컨디션이 점점 좋아져서 그런가 특히 5,6번째 곡은 애달프면서 담담한 곡을 표현하는데, 순간 가슴이 찌릿 아플 정도로 좋았다.

방황하는젊은이의노래는 실내악 버전의 반주가 낯설어서 처음엔 뭥미 싶었는데 듣다보니 꽤 좋았다. 웬로크는 이날 쌩처음 듣는 곡이었는데도 울컥하게 만드는게 있었다. 게다가 가사가 영어라 상대적으로 독어권 성악가에 비해 약점인 보스트리지의 리트 딕션이 완전이 극복된 곡이었다. 그의 모국어로 부르는 노래는 확실히 더 울림이 있었다. 곡이 끝나고 한참동안 먹먹해서 홀린듯 앉아있었다. 앨범도 주문했으니 다시 들어봐야지.

전체적으로 보스트리지는 상실감과 애달픈 청년 시점을 표현하는덴 특화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황으로 듣다보니 울컥하는 순간이 몇번 있었다.

앵콜 때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중 Standchen(세레나데)를 불러줬다. 흔한 앵콜이지만 좋았다. 내심 앵콜로 보스트리지가 무시무시하게 부르는 der zwerg나 마왕 기대했는데 앵콜로 하기엔 빡신 곡이긴 하다(특히 반주). 하이라이트 komm beglücke mich에서 어디선가 카톡 소리 울린 건 조금 깼다ㅠ

끝나고 주차장 쪽에서 어슬렁거리다 보스트리지와 마주쳤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 깐깐한 교수님 풍의 쿨내가 풀풀 풍겼는데 오랜 팬이었다고 싸인 부탁하니 냉기를 풀풀 날리며 쿨하게 해줬다. 약간 울적하면서도 묘하게 황홀하기도 한 밤이었다.

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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