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을 출발한지 2시간 15분 만에 아키타공항에 닿았다. 국제공항이라곤 하지만, 취항하는 국제선은 대한항공 인천 노선 하나뿐이기 때문에 국제선 구역(청사가 따로 있는게 아님)은 매우 작다. 딱 두개 있는 입국심사 부스를 통과하면, 딱 한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고, 입국장으로 나선다. 입국장에서 딱 열발자국쯤 걸어가면 바로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이 있을 정도로 공항이 작은데, 아무튼 입국장 문으로 나가면 미리 예약해둔 아키타 에어포트라이너 기사 아저씨가 영문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 

마침 이날은 뉴토온천 쪽 에어포트라이너를 타는 사람이 나와 엄마 뿐이라, 예상했던 승합차 대신 택시가 왔다. 택시를 타니 안에 '무사고 무위반 모범기사' 휘장이 잔뜩 붙어있었다.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시고, 나는 일본말을 못해서 매우 답답했지만 뭐 어찌됐든 야마노야도까지 간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아저씨가 나에게 "다츠코, 다자와코, 어쩌고"라고 하는데 못알아들었지만 "하이하이"라고 대답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고 출발했다. 아, 딱 한마디 알아들었다. "고꼬까라 야마노야도마데? 어쩌고저쩌고 이찌지칸 산쥬분". 대충 한시간 반정도 걸린단 소리겠다 싶었다.  

공항을 출발하자 바로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생크림 시트를 쌓아놓은 것처럼 도로 갓길로 밀어낸 눈더미 위에 또 새로 내린 눈이 쌓여 어른 키 높이 정도되는 새하얀 눈벽을 만들어냈다. 눈벽 너머로 펼쳐진 설원엔 곧게 뻗은 나무들이 눈송이를 가지에 이고 있었다. 갓길로 눈더미를 밀어냈지만 계속 쌀가루처럼 폴폴 날리던 눈이 쌓이고 쌓여 도로는 눈에 덮여 있었다. 얼핏 도로를 보니 렌트카를 빌리지 않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사 아저씨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눈길 운전 트라우마가 있는데도 마음을 놓을만큼. 다자와코(田沢湖·다자와호수)가 보이지 시작했다. 

설산 사이로 난 길을 뚫고 달리다보면 다자와코가 갑자기 나타난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호수가 비현실적이다. 다자와코는 일본에서 가장 깊은 호수다. 주변이 온통 눈과 얼음에 뒤덮여 있어도 호수가 얼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직 이 신비로운 호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몇년 전 히트했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이 김태희에게 '이 호수엔 슬픈 전설이 있어'라고 말하던 호수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다자와코의 '슬픈 전설'을 물어보면 다츠코히메의 전설을 말하겠지만, 다자와코는 수많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 또한 어린 곳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일제는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이곳에 수력발전소를 지었다. 수력발전을 위해 강과 호수를 잇는 도수로(導水路)는 조선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역만리 설국에서 죽어갔다. 

택시는 야속할만큼 잔잔한 호수를 따라 달렸다. 갑자기 기사 아저씨가 차를 세웠다.

"다츠코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알아들을 수 없다. "와카라나이"란 말을 간신히 떠올려 말하자, 기사 아저씨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사비스 사비스"라고 말했다. 목적지인 츠루노유 온천으로 가는 길에 아키타의 명물인 다츠코 동상을 지나니 구경하고 오란 뜻이었다. 차 밖으론 황금빛 여인상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는데 굵직한 눈발이 펑펑 날리기 시작했다.  

▲다자와코(田沢湖)에서 만난 다츠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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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다자와호수 근처 마을엔 다츠코(辰子)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소녀가 살았다. 다츠코는 자신의 미모가 언젠가는 없어져 가는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어떻게든 유지하게 해달라고 오쿠라칸노(大蔵観音)에게 기원했다. 오쿠라칸노는 다츠코에게 고자노이시 신사(御座石神社)의 물을 마시면 영원히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다츠코는 고자노이시 신사의 물을 마셨지만,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심한 갈증을 느꼈다. 계속 물을 마시다보니 다츠코는 용으로 변해버렸고, 다자와호수로 뛰어들어 호수의 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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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노이시 신사를 들러 둘러본 뒤 차는 눈길 속으로 달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좁아지고 길 양옆으로 밀어놓은 눈벽은 높아졌다. 갑자기 약해지던 스마트폰 3G 신호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끊어졌다.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지 30분쯤이 지나자 '츠루노유 온천(の湯 溫泉)' 팻말이 보였다. 눈에 파묻혀 간신히 목만 내놓고 있는 야마노야도(山の宿)라고 적혀있는 나무 팻말을 지나고 얼마 뒤 산속 오두막집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휴대폰을 꺼내보니 3G뿐 아니라 통화신호까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야마도야도의 입구. 눈으로 만든 집 '가마쿠라'가 방문객을 반겼다. 처마엔 굵다란 고드름이 빼곡히 매달려있다. 

▲야마도야도의 로비. 석유난로에 앉아 쉴 수 있는 아늑한 로비는 눈보라에 지친 방문객을 포근하게 맞아준다. 

야마도야도의 문을 열면 자그마한 로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슬리퍼를 신고 나무 바닥에 올라서면 바깥에선 느낄 수 없었던 온기가 느껴진다. 아주 오래 전 맡아본 석유난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권해주는 자리에 앉아 체크인 서류를 작성하고 나면 씩씩한 여직원이 캐리어 두개를 맡아 들고 묵을 방까지 안내한다. 유창한 영어실력은 아니지만 방까지 가는 내내 료칸의 곳곳을 열심히 설명해주는 모습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은은한 조명이 밝히는 복도. 복도를 따라 객실까지 가는길엔 식당, 욕탕이 보인다. 커다란 창밖으론 료칸을 품고있는 눈밭이 펼쳐진다. 


▲사진=야마노야도 홈페이지 /야마노야도의 노천탕

◀사진=야마노야도 홈페이지/야마노야도의 실내탕(백탕)

안내 받아 먼저 들어가본 온천은 자그마한 실내탕(남녀 각각 하나씩) 하나와 노천탕으로 이뤄져 있었다. 실내탕과 노천탕 입구는 따로 분리돼 있었고 노천탕은 남녀 따로 구분없이, 먼저 오는 사람이 통로 문을 잠그고 독점할 수 있었다. 안내해준 직원은 "First come, first served"라고 소개했다. 노천탕 물가 바로 옆까지 눈이 쌓여 있었는데, 뽀얀 물색깔에 수증기까지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황냄새가 났지만 역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진=야마노야도 홈페이지/방안 내부

운좋게도 탕 바로 옆에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방 안엔 비데가 설치된 양변기, 샤워기와 욕조가 딸려 있다. 냉장고와 세면대도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다기를 담은 나무상자 위로 웰컴푸드로 준비된 화과자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눈쌓인 뜰이 보이는 큰 창 옆엔 흔들의자가 놓여있고 방 한쪽엔 코타츠도 있었다. 방까지 안내해준 직원은 저녁 먹을 시간을 물어본 뒤, 방안 곳곳을 안내하고 츠루노유 온천 본관까지 가는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해준 뒤 자리를 떴다.  


▲설경을 보면서 잡생각을 내려놓기 최적의 환경. 책을 읽다 졸다 다시 깨어 책을 읽기에 딱 좋은 흔들의자가 놓여있다.  

▲일본식 난방기구 '코타츠'에 한번 앉으면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저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전원을 켜면 아래 있는 전열기구가 켜지면서 꽁꽁 언 몸이 발부터 사르르 녹는다. 여기 앉아서 책을 읽고 하루를 정리하는 메모장을 적으면서 귤을 까먹다보면 긴 겨울밤도 금새 흘러간다. 

료칸 곳곳을 구경하고 코타츠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 저녁은 방안에서 먹는 게 아니라 오는 길에 복도에서 봤던 식당으로 가야한다. 식당에 들어가니 방 하나가 엄마와 내 몫으로 지정돼 있었다. 츠루노유 야마노야도에서 2박을 하는 동안 총 네끼를 먹게 될 방이라고 했다. 방 한가운데는 숯불이 타고 있는 화로(이로리· いろり)가 있었고, 숯불 주위엔 초벌구이한 곤들메기가 꼬챙이에 꽂혀 덥혀지고 있었다. 츠루노유 온천을 둘러싸고 있는 산속을 흐르는 계곡물에서 잡았다고 했다. 

이로리 주위엔 각자 먹을 밑반찬과 다기가 놓인 반상이 세팅돼 있었다. 아까 우리를 방까지 안내해줬던 직원이 들어와 저녁식사 메뉴를 소개해줬다. 쌀이 유명하다는 아키타답게 아키타 산 쌀로 만든 감주를 식전주로 만찬이 시작됐다. 따뜻한 두부와 사시미가 에피타이저로 나왔다. 메인 메뉴는 방 가운데 이로리 숯불에 구워먹는 바베큐였다. 


돼지등심과 각종 버섯, 완자, 감자, 고구마 외에도 특이한 건 산마를 구워먹을 수 있게 저며서 나왔다. 고기를 소스에 재워 굽는 건 각자의 몫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석쇠 위에선 취향에 맞게 재료가 익어가고, 직원들은 불편한 점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가며 바쁘게 오갔다.  

석쇠구이 상이 얼추 정리될 무렵엔 직원이 큰 냄비를 가지고 와서 화로 위에 매단다. 이미 한소끔 끓여나온 냄비요리라 은근한 숯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도록 유지만 하는 것이다. 이곳의 명물 야마노이모노나베(山の芋の鍋, 참마나베)다. 

돼지고기를 우려낸 육수에 미소를 풀고 얇게 저민 돼지고기와 버섯과 참마당고(산에서 자라는 참마를 다져서 경단같이 만들었다)를 넣어 끓인 뒤 미나리를 송송 썰어 뿌렸다. 처음 보는 조합이지만 거북스럽게 낯설진 않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참마당고는 찹쌀 옹심이와 비슷하지만 덜 텁텁하고 깔끔하다. 

나베가 익어가는 동안 까만옻칠을 한 나무 그릇을 들고와서 밥을 살살 담아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은 먹어보지 않고 때깔만 봐도 좋은 쌀로 지은 것 같다. 일본에서도 가장 유명한 쌀 산지 중 하나답다. 고슬고슬하게 지어놓은 쌀밥만 먹어도 달달하니 맛있다. 나베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차가운 이나니와 냉우동에 이어 샤베트와 과일을 담은 그릇과 우롱차가 나오면 저녁식사가 끝난다. 한시간이 넘게 화로가에 앉아 밥을 먹다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 쩔어버린 얼굴에서사라졌던 핏기도 돌아왔다. 바깥의 눈세상을 까맣게 잊을만큼 속이 훈훈해지는 저녁식사였다. 질 좋은 산지 재료를 정성스럽게 마련한 저녁식사는 화려한 가이세키 요리보다 실속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며 메모를 남긴 뒤, 미처 열어놓지도 못한 짐을 조금 풀어놨다. 유카타로 갈아입고 유카타 위에 걸칠 유카타용 외투까지 입었다. 제대로 된 겉옷이 아니라고 얕봤지만 입어보면 꽤 따뜻하다. 유카타와 함께 곱게 개켜놓은 목욕가방에 수건과 세면도구를 챙겨들고 방 바로 옆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방 옆에 나 있는 문을 열고 장화로 갈아신은 뒤 별채로 나가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노천탕 출입문을 걸어잠그고 눈을 맞으며 눈으로 둘러싸인 노천온천을 즐겼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에선 별빛과 눈송이가 섞여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TIP)

-야마노야도의 직원들은 대개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줄 안다. 영어를 잘 못해도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야마노야도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다. 인터넷을 안 쓰려고 가는 곳이므로 미리 알아두고 가야한다. 3G는 물론이고 전화 신호도 매우 약하다. 로비에 공중전화가 설치돼 있다.

-유카타를 입을 땐 왼쪽 옷섶이 위로 가도록 입는다. 오른쪽이 위로 가면 죽은 사람을 의미한다.  

-야마노야도와 츠루노유 본관 온천 모두 탕 내에샤워를 할 곳은 따로 없다. 방안, 혹은 공동샤워장에서 미리 애벌샤워는 하고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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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i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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