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이하 POTO)’을 처음 본 것은 2001년 한국어 라이센스 초연이었다. 지금은 대스타가 된 김소현, 류정한이 각각 크리스틴과 라울로 나왔고 이 작품이 데뷔작이었다. 제대로 뮤지컬을 관람한건 POTO가 처음이었다.
당시 이 공연의 VIP석 가격은 15만원이었다. 굉장히 큰 돈이었지만 좌석수가 많지 않아서 정말 VIP 같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무튼 그날 공연의 임팩트는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찌릿한 느낌이 생생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후로 정말 유령에 홀리듯 한동안 POTO에 빠져 살았다. 한국어 캐스트 앨범, 오리지널 캐스트 앨범을 사서 재킷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이때 나는 외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밤낮 없이 전공연 녹음 음반을 들어댄게 결과적으로 영어 공부에 꽤나 도움이 됐다(사실 POTO를 매개로 다른 뮤지컬 음반도 사서 무지막지하게 들어댔다). 현재 구사하는 영어 구사 수준에 POTO가 직간접적으로 최소 20%는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1학년 여름방학 때 영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런던의 Her Majesty’s Theatre에서 POTO를 볼 기회가 그렇게 생겼다. 첫 기말고사를 앞두고 야자 시간에 대본을 펴놓고 POTO 전곡을 듣고 또 들었다. 컴퓨터를 쓸 짬이 나는대로 영국에서 머물게 된 옥스포드 시내에서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까지 가는 길을 찾아서 숙지했다. 티켓 예매는 카드가 없어서 실패했지만, 현장표를 어떻게 구하는지 찾아서 깨알같이 수첩에 적었다. 외고에서 첫학기가 끝날무렵 꽤 두툼한 POTO 대본은 다 외웠지만(지금까지도 줄줄 외울 정도로), 그 학기 내신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영국에 갔다. 하루 수업을 째고 혼자 시외버스에 올랐다. Victoria Coach Station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마블아치를 지나 피카딜리서커스에 내렸다. 인터넷에서 눈에 익을 정도로 본 큐피드 동상을 주변을 좀 헤매다가 당일 티켓 파는 곳에서 운좋게 그날 낮공연 POTO 좋은 좌석을 구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고풍스러운 극장의 Dress Circle에서 우아하게 음료까지 마시면서 본 공연은 태어나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이 몇개 중첩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공연은 한국에서 처음 봤던 한국어 공연 이상으로 가슴을 찌릿하게 울렸다. 머릿속에 대본을 집어넣으면서 수없이 상상했던 씬들이 눈앞 무대에서 펼쳐지는 순간순간이 황홀했다. 공연이 끝난 후 가슴이 계속 두근거려서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극장 주변을 빙빙 돌았다. 허기가 두근거림을 압도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꿈꾸는 듯한 상태를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덧붙여 이날 공연의 라울이 라민 카림루였다)
그리고 나서도 런던에서 또 한번,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두번, 한국에서 두번 더 POTO를 보았다. 그날그날 공연의 사정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하는 공연이다.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팬텀 역을 맡았던 라민 카림루는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의 마이클 크로포드 이후 아마 가장 사랑 받는 팬텀 중 한명이다. 그 라민 카림루가 사흘간 콘서트 형식의 POTO 공연에서 팬텀을 맡는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도 안해보고 티켓을 질렀다.
정말 굉장한 공연이었다. 중성적이고 미스테리한 분위기와 불을 뿜는듯한 카리스마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라민 카림루의 팬텀에 140분 동안 홀리고 말았다. 맨 마지막 씬, “You alone can make my song take flight, it’s over now the music of the night”라는 대목을 부를 땐 뭔가 뜨거운게 울컥할 정도로 절절했다.
크리스틴 역을 맡은 애나 오번도 좋았다. 크리스탈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 배역에 딱이었고, 성악을 공부해야 제대로 소화하는 배역을 맡은 성악도 출신임에도 과한 비브라토가 없이 쭉 뻗는 깨끗한 고음이 귀를 정화하는 느낌이었다.
라울을 맡은 마이클리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비록 콘서트 형식이라 의상을 갖춰입진 않았지만, 다소 뻣뻣해도 박력있는 라울 연기까지 보여줬다. 감미롭고 따뜻한 느낌의 목소리가 라울에 어울렸다. 그리고 늘 느끼지만 마이클 리는 한국어보다 모국어인 영어로 공연할 때 훨씬 잘한다.
칼롯타, 피앙지, 피르맹, 앙드레, 마담&멕 지리 등등 모두 구멍 없이 꽉찬 캐스팅이었다
여전히 홀린 듯 긴 여운에 잠겨있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밤이다.
but...타이틀곡에서 타이틀롤 등장할 때 무선마이크 삑사리 나게 한 음향팀 무엇... 그 다음 소절부터 감동이 삑사리를 묻어버려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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