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노(Lugano)에서 첫 아침이 밝았다. 한기가 느껴지던 체르마트의 아침과 달리 루가노의 아침은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 위를 간질이고 있었다. 파란호수와 빨간벤치, 녹색 분홍색 같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이뤄진 도시는 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색을 내고 있었다.
아침을 먹자고 호숫가를 기웃거리다가 들어간 곳은 결국 맥도널드ㅋㅋ 그래도 여지껏 스위스 여행하면서 다닌 맥도널드 중에서 가장 호화롭다. 무려 호수를 보면서 여유롭게 크루와상이랑 카페오레를 먹을 수 있는 맥도널드. 맥도널드 테라스 자리에 앉아서 아침을 먹는데, 참새떼(...)가 몰려드는 탓에 공포에 떨면서 아침을 먹었다.
'루가노'란 지극히 이탈리아 도시스러운 이름에서부터 햇살과 떠들썩한 광장과 알록달록한 건물이 연상됐는데, 아침에 맞닥뜨린 루가노는 진짜로 그랬다. 길을 걸으면 투박한 독일어와 달리 달콤하면서도 쾌활한 이탈리아어가 귀를 간질인다. 평일 아침인데도 거리는 바쁘다기보단 나른하고 여유롭다. 광장에 내려앉는, 파란 호수에 부딪쳐 반짝이는 햇살도 유달리 따사롭다.
루가노에 오니까 그냥 조용하고 여유로운 이 분위기를 마냥 느껴야할 것 같았다. 스위스 여행 내내 어딜가나 바쁘게 움직였던 기억만 났다. 캐리어를 끌고 급히 기차를 타고, 배낭을 매고 산에 올라갔다가 기차 시간에 맞춰 바쁘게 내려오고. 숨찼던 여행을 정리하는 마지막 도시인 루가노는 '쉬다가라'고 손짓하듯 여유로웠다.
빨간 벤치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멍때리고 호수를 바라봤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으니 사람구경도 원없이 했다.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쓰는 이 나라 사람들이 부러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리고 간드리아 행 배 티켓을 끊었다(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어권에 왔으니 젤라또도 먹어주고...
이 젤라또를 먹으면서 문득 생각나서 배 시간을 확인해보니...
하아...ㅋㅋㅋㅋㅋ 간드리아 가는 배가 딱 10분 전에 떠난 거였다. 내가 간드리아행 배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보니 바로 옆에 있는 모르코테 행 배 출발시간이었던 것. 그래서 뭐 별 수 있나. 40분 기다려 다음 배를 타기로 하고, 간드리아에 내려서 먹부림을 부리는 건 포기했다. 배 타고 간드리아를 휙 둘러보고 뱃놀이를 하는 걸로 일정을 급수정한 뒤 다음 배를 기다렸다.
간드리아행 배는 예정보다 15분이나 늦게왔다. 늦어지는 것에 짜증을 내지 않기로 전날 밀라노 첸트랄레 역에서부터 다짐했다. 여긴 이탈리아(나 다름없으)니까. 루가노 호수를 오가는 유람선을 타고 한 20분쯤 가면 간드리아에 도착한다.
▲간드리아에 도착하기 전에도 아기자기한 호숫가 마을들을 지난다. 아예 이런 작은 마을들에 바캉스를 온 건지, 큰 캐리어를 갖고 배를 타서 이런 마을에 내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려서 올리브 나무 길을 걸을 예정이었던... 간드리아(Gandria).
호수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멀리서 간드리아로 다가갈 땐 호수를 굽어보는 비탈에 그림처럼 그려놓은 듯한 모습 때문에 '저 안에 정말 사람이 살고있나' 생각이 든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림같은 집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줌마, 펄럭이는 빨래 자락을 보고 나서야 실제로 사람들이 지내는 마을이란 게 실감이 난다.
간드리아는 예전부터 치즈와 올리브를 직접 생산하고 가공해 만들어 팔던 마을이었다. 간혹 호수 근처의 이탈리아와 스위스 마을들이 밀무역을 하던 중심지이기도 했다고. 앙증맞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이 마을엔 '밀수박물관'까지 있다.
배에서 내려 잠시 숙소에 들렀다가 밀라노행 레지오날레 기차를 탔다. 그 이탈리아 밀라노가 맞다. 밀라노에서 완행열차로 한시간 거리 떨어져 있는 루가노는 밀라노 생활권이나 다름없어서 출퇴근에 레지오날레를 타면 기차가 몹시 붐비곤 했다. 이날 밀라노엔 단지 쇼핑을 위해서...
늘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밀라노첸트랄레 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탔다(지하철을 탔는데 웬 집시들이 잔뜩 몰려와서 1day 티켓 끊을 때 자꾸 도와주겠다며 10유로를 기계에 넣으라는게 아닌가... 그 티켓 4.5유로라 5유로 넣으려니까 자꾸 "노노노 노 친퀘!! 디에치!! 디에치 에우로!!(5유로 아님!! 10유로!! 10유로!!)"라는데 내가 바보냐... "씨씨씨 까피스꼬(어 그래그래 알았어"하면서 5유로 넣고 무사히 티켓 끊은 다음 50센트까지 챙김).
딱히 밀라노에 생각나는 쇼핑가라곤 두오모 옆에 있는 비또리오 에마누엘레 갈레리아 밖에 생각이 안나서 일단 두오모에 내렸다.
▲오랜만에 다시 보 두오모. 날이 맑을 때 보니까 이렇게 하얗게 빛나기도 하는구나. 예전에 왔을 땐 꾸물꾸물한 날이라 저 두오모의 첨탑이 아주 음산하게 보였다.
▲혼자 간거라 두오모 광장에서 사진 찍으려면 셀카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난 이렇게 얼굴 크게 나오는 구식 셀카를 찍고 있는데, 광장 곳곳의 한국인 여행객들은 무려 셀카봉을 가져와서 찍고 있더라. 셀카봉 실물 본게 두오모 광장이 처음이었는데... 나도 신기했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이랑 서양 관광객들은 난리났음. 넋들을 놓고 쳐다봤다.
▲갈레이아 한 가운데에서 인증샷을...
신나게 밀라노 시내를 한 3시간 정도 돌아다녔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샀다. 스톤아일랜드 재킷이 참 예쁘긴 했지만, 동생 사이즈에 맞을지 안 맞을지 몰라 결국 포기(그나저나 스톤아일랜드 직원들 정말 친절했다. 직접 동생 체격이랑 비슷한 직원이 입고 시착해보는데도 전혀 귀찮은 기색조차 보이지 않음)
결국 빈손으로 터덜터덜 루가노로 돌아오니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호텔방에서 뻗기 전에 밥을 먹으러 나섰다. 전날 가려다가 길 찾기가 귀찮아서 포기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루가노.. 아니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식사라니까 추천 받은 맛집에 꼭 가볼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결론 : 루가노 가시는 분들, 치오카로 광장 근처에 잇는 '라 티네라(La Tinera)' 꼭 가세요, 두번 가세요.
여기 진짜 맛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그로또(Grotto : 와인 저장고) 느낌의 레스토랑인데, 정말 나와 친구 빼고 다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연히 스위스에서 간 레스토랑에서 제일 말이 안통함. 영어 잘 안통하고, 프랑스어 약간 하시는 것 같은데 어쨌든 주문도 이태리어로 해야한다. 이탈리아말로 해야지 영수증 갖다주고, 맛있냐는 말도 이탈리아어로 물어봄...
이날 여기서 '오늘의 메뉴'였던 스테이크(통살 스테이크는 아니고 소고기 함박스테이크 느낌)랑 '리조또와 소시지'를 먹었는데 둘 다 무지 맛있었다. 함께 시킨 와인과 맥주도 매우 굿... 특히 와인이 정말 쌌다. 한 세잔 정도 나오는 작은 병에 따로 담아주는데 한국 돈으로 7000원 정도? 질도 매우 훌륭하다.
맛있어서 내친김에 후식까지 시켜먹고 가자고 후식을 시켰는데 아저씨가 내 시원치 않은 이탈리아어를 잘못 알아들었는지 'Gelato misto(젤라또 모듬?)' 달라는 걸 난데 없이 티라미수를 갖다줬다.. ㅋㅋㅋㅋ
그러나 티라미수 맛의 신세계를 맛보았으니 결과적으론 그닥 나쁘지 않았다. 티라미수에서 이렇게 커피향이 그윽하게 나면서도 안 느끼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음.
밥을 몹시 배부르게 먹어서 바로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루가노 호숫가로 나왔다. 낮에 간드리아를 오갔던 유람선은 선상클럽이 되어 신나는 음악이 호숫가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배 안으로 들어가 놀진 않았지만,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신이 났다. 떠들썩한 거리, 너무 요란하지 않게 물가를 밝히는 조명, 시원한 바람.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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