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eidoscope/공연

SIMF 2019 이안 보스트리지&줄리어스 드레이크 ‘겨울나그네’

AlixJ 2019. 5. 13. 01:35

<서울국제음악회: 보스트리지와 드레이크의 슈베르트 I(겨울나그네)>

 

2019년 5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Ian Bostridge(테너)
Julius Drake(피아노)



예전에 쓴 보스트리지 공연 리뷰에도 언급했듯 고등학교 시절에 리트를 참 많이 들었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의 레퍼런스(사실 겨울나그네 뿐 아니라 많은 리트들의 레퍼런스인) 피셔-디스카우로 입문해서 한스 호터, 페터 슈라이어, 프리츠 분덜리히 등 이미 옛날 사람의 반열에 속하는 분들로 시작해 동시대 성악가들의 리트 음반을 찾아 듣기에 이르렀는게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게 이안 보스트리지였다.

겨울나그네를 처음 들었을 땐 참 우울이 곳곳에 깊게 침투한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사를 곱씹으며 재차 들어보면 24개의 곡에 우울, 흥분, 기쁨, 분노, 허무 같은 다양한 감정이 골고루 오간다. 특히 보스트리지의 표현력이 좋기 때문에 마음을 찢어놓고 옅은 희열과 격앙된 흥분과 그런 감정선이 참 잘 전달됐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무대 위의 가수와 피아니스트만 하겠느냐만은, 깊게 몰입했다가 공연이 끝나니 뭔가 감정 소모로 인한 기빨리는 기분이 좀 들기도 했다.

공연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자면 오늘 보스트리지나 반주자인 드레이크의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그래서인지 공연도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사스키아 지오르지니와 함께 했던 ‘멀리있는 연인에게’ 공연 때는 반주가 좀 아쉬운 면이 있었다. 역시 오랜 파트너인 드레이크와의 공연이어서 그런가 찰떡 같았다. 리트 공연에서 반주자가 조연이 되느냐, 거의 대등한 파트너가 되느냐에 따라 그날 공연의 호연 여부가 많이 좌우되는 것 같은데 오늘은 확실히 후자였다.

리트 가수로서 보스트리지를 탐탁치 않게 평가하는 의견으로 네이티브가 아닌 독일어 딕션을 드는 사람도 좀 본 것 같다. 리트는 가사 전달이 중요한 장르이고, 확실히 초기 음반에서 독어 딕션이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점차 개선되어 그런지 독일어 딕션이 크게 거슬린다는 점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저음으로 뚝 떨어질 때 잘 안 나오는 저음이 약간 아쉽긴 했다.

피셔-디스카우의 영향 때문인지 겨울나그네는 바리톤의 곡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뭔가 이 곡이 주는 쓸쓸하고 어두운 인상이 바리톤에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갖고 있기도 했고. 보스트리지는 본인 저서인 ‘겨울나그네’에서 본래 슈베르트가 이 연가곡을 작곡했을 때 테너의 테시투라로 출판됐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공연을 보고 나니 그의 자신감도 이해가 되고, 이 곡이 바리톤의 곡이라는 인상도 한층 걷어냈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감정의 깊은 곳까지 후벼파는 표현력이 일품이었다. 24곡까지 다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게 됐다(갑분 박수 ㅅㅂ). 그만큼 잔상이 오래 남고, 감정이입도 되고, 공연을 본 입장에서도 감정 소모가 좀 있는 공연이었다. 보컬과 피아노 만으로 이렇게 차원이동시키는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음악 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좀 있었다. 다른 성악곡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에 곡을 붙인 리트는 가사 전달이 매우 중요한 장르다. 모두가 독일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패시지에서 무슨 소리 하는진 알아들어야 제대로 이해되는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띄워놓은 스크린에 수동으로 가사 넘긴 인간은 정말 아마추어였다. 공연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헤매는게 이 공연의 대단한 옥의 티 중 하나였다. 12곡 고독과 13곡 우편마차 사이에선 아예 다른 곡을 띄워놓고 우왕좌왕 스크린 넘기길 반복했다. 부디 남은 공연들에선 이딴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트는 대체로 ‘조용한’ 음악이다. 사이사이 쉬는 구간의 호흡도 그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가수나 청중이나 호흡을 고르는? 따라서 이 부분에서 기침을 도저히 못 참고 폐병 걸린거마냥 기침이 복받친다면 그냥 리트 공연은 안 오는게 낫다고 본다. 그 외에도 (매니악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관크가 제법 있었다. 핸드폰 소리도 어디선가 들렸다. 중간 입장하는 아지매들은 무슨 패기인지 모르겠다. 예당도 이런건 엄격히 제지해야 프로다운 자세일 것이다.



아, 공연 끝나고 기립하는 분위기였다. 기립할만한 공연이었음. 사람들이 앵콜 기대했을 수도 있으나 앵콜은 없다. 연가곡이 끝났을 때의 여운과 분위기가 앵콜을 함으로써 단절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앵콜이 없는게 나쁘지 않았다. 보스트리지의 목소리를 더 듣고싶긴 했지만...

남은 2회의 공연도 너무너무 몹시 기대된다. 혹 리트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가길. 슈베르트 연가곡을 현존하는 이 분야 최고 수준의 조합으로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공연 끝나고 감정 삭이고 현실 복귀하기 위해 남부터미널까지 어두운 길을 따라 걸어갔다. 밤공기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