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winter/雪國//Day 3-Akita→Echigo Yuzawa
솔직히 휴가를 떠나기 전엔 생소한 지명인 아키타, 그것도 깊은 산속에 틀어박힌 온천장에 이틀씩이나 머무르는 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완벽히 쉬고싶은 상태로 일상을 떠나온 사람에게 츠루노유는 떠날 때가 다가올 수록 아쉬운 곳이다. 2월 4일, 아키타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야마노야도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
마지막날 아침은 정성스러운 아침식사로 시작했다. 이로리에 숯불이 타고 있는 식당에 들어서면 잘 다듬은 생선이 접시에 놓여있다. 밥을 먹으면서 할일은 생선이 취향에 맞게 알맞게 구워질 때까지 굽는 일이다. 두부요리와 계란말이, 신선한 산채, 따뜻한 미소시루 같은 아침상이 올라오고 윤기가 흐르는 아키타 쌀밥이 소담스레 담긴 밥그릇이 놓인다. 산속에 있는 숙소라 산마를 사용한 식단이 아침에도 나왔다. 마를 갈아서 생선알을 올린 후 밥에 얹어먹는 음식이었는데, 살짝 짭짤하지만 밥이 뚝딱 없어질만큼 입에 착 붙는 감칠맛이 돌았다.
▲츠루노유 별관 야마노야도를 떠나기 전.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츠루노유 별관 야마노야도를 떠나기 전.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이틀 동안 오갔던 다자와코역
◀아키타 신칸센과 조에쓰 신칸센을 타고 가는 경로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자와코역에서 오전 9시 12분에 출발하는 도쿄행 신칸센을 타기 위해 서둘렀다. 다자와코를 출발한 신칸센 코마치를 타고 일본 서해안을 따라 모리오카와 센다이를 지나 사이타마현 오오미야(大宮)까지 가서, 죠에쓰 신칸센으로 갈아타고 목적지인 소설 '설국'의 무대 에치고유자와(越後湯沢)까지 가는 4시간 일정이었다. 바로 이날 자그마치 1만9930엔이나 드는 신칸센 표값이 JR동일본패스를 끊은 목적이기도 했다.
신칸센은 지정석 객차와 자유석 객차가 따로 있지만 도호쿠(아키타) 신칸센 코마치는 전석 지정석으로 운행된다. 따라서 JR패스 소지자도 발권 창구에서 패스를 내밀고, 좌석번호가 찍힌 승차권을 끊어야한다. 물론 패스를 소지했으면 추가요금은 없다. 신칸센으로 장거리 이동할 땐 객차 맨 뒷자리가 명당이다. TGV와 달리 객차와 객차 사이에 따로 짐놓는 칸이 없기 때문에, 머리 위 짐칸에 올려놓을 수 있는 사이즈를 넘어선다면 그 짐을 그대로 좌석 앞에 모시고 타야한다. 뒷자리에 앉으면 좌석 등받이와 벽 사이 공간을 수납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다자와코역에서 발권할 때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맨 뒷자리 발권을 부탁했고, 다행히 역무원 아저씨가 알아들어주신 덕에 짐을 등 뒤에 보관하고 편히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코마치는 다자와코-모리오카-센다이를 지나 우츠노미야까지 곧장 달렸다. 센다이에서 사람들이 꽤 많이 탔는데 얼마 후 지날 후쿠시마에 기차가 설 줄 알았으나, 후쿠시마역은 그냥 지나쳤다. 원전사고가 난 후쿠시마현의 현청소재지인 후쿠시마시가 맞다. 원전이 위치한 바다 쪽이 아니라 내륙을 통과했지만 그래도 찝찝함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다. 후쿠시마현을 지날 땐 외교부에서 경고문자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냥 '카더라'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센다이역에서. 도호쿠 지방의 중심지답게 사람들이 꽤 많이 탔다.
오전 11시 38분 오오미야역에 도착했다. 아키타와 비교하면 훈풍이 부는 따뜻한 겨울날씨에 잠깐 당황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니이가타현의 도시가 과연 소설 속 '설국' 같을지 걱정이 앞섰다. 오후 12시 18분 죠에쓰 신칸센 MAX타니가와에 올랐다. 죠에쓰 신칸센은 겨울철 한시적으로 에치고유자와역 대신 가라유자와(ガーラ湯沢)역을 신칸센 토키와 타니가와의 종점역으로 운행한다. 후술하겠지만, 가라유자와역은 내리자마자 바로 스키장이다. MAX타니가와는 객차가 2층인데, 평일인데도 수도권에서 니이가타현 스키장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타고 있었다.
한시간 정도 달리자 열차는 긴 터널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국경의 긴 터널'에 들어갔다고 직감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눈의 고장에 도착하기 직전.
군마현과 니이가타현을 가르는 '국경의 긴 터널'은 맞지만, 신칸센을 타고 지나는 터널은 소설 속 그 터널은 아니다. 신칸센을 타면 지나는 다이시미즈(大清水) 터널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미즈(清水)터널은1931년 개통됐다. 길이는 다이시미즈 터널이 22km로 시미즈터널보다 13km가까이 길다.
터널을 지나기 전 봤던 따뜻한 간토지방의 벌판엔 보리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설국을 찾아가는 여행인데, 때아닌 훈풍과 봄기운을 느끼고 살짝 걱정이 됐다. 터널 너머에 설국이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긴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얀 눈의 고장이었다. 열차는 에치고유자와역에 멈춰섰다.
에치고유자와역은 스키나 스노우보드 장비를 들고 온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에서 묵을 곳은 역에서 가까운 상점가에 위치한 '쇼센가쿠 카게츠(松泉閣 花月)'란 료칸이었다. 역에서 가깝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도 가까워서 이곳을 택했다. 온천이나 식사에 대한 평도 좋은 편이었다.
에치고유자와역 서쪽 출구에서 걸어서 5분 정도면 도착하기 때문에 송영버스가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온천물을 뿜어내 눈을 녹이는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있었다. 신발과 캐리어를 버리지 않으려면 송영버스를 예약하는게 편리하다.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료칸의 로비는 넓직하고 정갈하다. 아담하지만 정감있는 야마노야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오카미상의 안내를 받아 로비 한켠에 마련된 게스트룸으로 이동했다. 숙박카드를 작성하고 맛차와 모로코시를 웰컴티로 받았다(너무 달았다).
▲맛차와 모로코시와 뜨거운 물수건.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이 오카미상을 대신해 엄마와 나를 담당했다. 숙박카드 작성을 돕고, 카드를 작성한 뒤엔 료칸을 안내하는 책자를 펼쳐놓고 곳곳을 설명했다. 방안으로 가는 동안 꽤 묵직한 캐리어를 양 손에 들고 앞장섰다. 3층에 위치한 방에선 에치고유자와 시내 풍경이 내려다 보였다. 방안 시설을 설명하고, 온천 이용 규칙에 유카타 입는 법까지 설명하고 직원은 자리를 떴다.
▲쇼센가쿠 카케츠 료칸의 방안 모습.
오후 2시쯤 됐는데 점심을 못 먹은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소바집 '나카노야(中野屋)'를 찾아나섰다. 누가봐도 온천마을 같은 분위기가 나는 서쪽과 반대로, 역 동쪽 출구로 나가면 생선가게, 라면집 같은 좀 더 일본 동네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역에서 2분 정도 걸으면 나카노야의 삼각지붕이 보였다.
▲,▲▲사진=나카노야 홈페이지/에치고유자와에서 첫끼를 먹은 곳. 목요일 휴무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나카노야 안에는 손님이 꽤 많았다. 오전 내내 스키를 즐긴 듯한 젊은 손님들이 한무리 모여 앉아 늦은 점심과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영어 메뉴판을 요청했다. 엄마는 차가운 자루소바, 나는 덴푸라가 들어간 온소바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homemade noodle'을 강조했는데, 허풍은 아닌 듯했다. 메밀향이 진한 진짜 메밀국수가 나왔다. 따뜻한 국물도 좋지만 이런 면은 자루소바로 먹는게 더 나은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추운 날씨에 따뜻한 게 땡기는 건 여기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자루소바를 시키면 따뜻한 메밀면수를 줬다.
식사를 한 후엔 마을을 산책하면서 '설국'이 쓰여진 다카한(高半) 료칸에 가보기로 했다. 밥을 먹고 다시 역으로 돌아와 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시내 지도를 받았다. 지도상 거리도 꽤 멀어보였다.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이렇게 말도 안되는 높이의 눈더미가 쌓여있다. 겨우내내 눈을 치우지 않고 이렇게 쌓아놓거나 아예 도로마다 깔려있는 스프링클러로 녹여 흘려버리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쌓아놨는데 눈더미가 무너지지 않는게 용하다 싶었다.
◀지붕에 눈이 너무 심하게 쌓였다 싶으면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서 눈을 치우기도 했다. 쌓인 눈의 무게 때문에 눈더미는 폭신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딱딱했다. 지붕위에 올라간 일꾼들은 눈을 퍼서 치우는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눈더미를 깨서 조각을 바닥으로 던졌다.
▲다카한 올라가는 길. 평화로워 보이는 표정이지만 스프링클러로 뿌려대는 물 때문에 어그부츠가 홀딱 젖었다. 양말까지 물기가 배어들어가서 몹시 찝찝했다. 숙소에서 고무장화를 빌려준다고 할 때 모양 빠져도 그냥 신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고무장화를 신고 다니고 있었다.
▲다카한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다카한은 에치고유자와를 굽어보는 언덕길에 위치해있다.
▲다카한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언덕길을 따라 뜨뜻한 온천물에 녹은 눈이 흘러내렸다. 장화를 신고가지 않으면 올라가기 매우 힘들다.
▲, ▲▲다카한 앞에서.
사실 다카한에 묵으려고 예약을 시도했었다. 불행히도 여행 넷째날인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다카한의 모든 방이 만실이었다. 셋째날만 다카한에서 묵을 수도 있었지만, 같은 도시 안에서 방을 옮겨다니는게 내키지 않았다. 결국 다카한을 포기하고 차선책이던 쇼센가쿠 카게츠로 숙소를 잡았지만, 다카한 입구에 들어선 순간 하루라도 묵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로비는 묵직한 느낌을 주는 목재로 장식돼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인테리어는 고마코를 떠올리게 했다. 로비엔 잔잔한 샤미센 연주가 흘렀다. 소설 속 장면이 머릿속에 흘렀다.
로비에서 관람료 500엔을 내면 2층에 있는 설국 문학관을 둘러볼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육필 원고 등 설국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고, 가와바타가 1935년부터 머물며 '설국'을 집필한 '안개의 방(かすみの間)'을 재현해놓았다. '고마코'의 모델이 된 게이샤 마쓰에(松榮)의 빛바랜 사진과 옷가지도 전시된 채 멀리서 온 방문객을 맞고 있다.
▲설국 문학관 앞에서.
▲,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물며 '설국'을 집필한 '안개의 방(かすみの間)'. 창문을 열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에치고 산맥이 안길 듯 성큼 다가온다. 해질 무렵 이곳에 오면 삼나무 숲이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한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설경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소설 '설국'은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다카한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리막길은 훨씬 걷기 수월했지만 신발은 그냥 포기했다.
▲료칸에서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자리마다 놓여있는 이름표에 그날의 가이세키 코스가 적혀있다.
다카한을 둘러보고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이 료칸도 방안에서 밥을 먹는 대신, 식당에 마련된 지정석에서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식사에 대해선 특별히 쓸 말이 없다. 화려하고 예쁘게 꾸민 가이세키 요리가 나왔는데 인상적인 요리는 없었다. 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예쁜 요리들이었다. 이날의 테마는 육류였는지, 바다가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해산물 요리는 코스 초반 사시미 빼고 거의 없었다. 코스 후반부에 나온 쌀밥은 훌륭했다. 아키타와 더불어 일본의 2대 쌀 산지라는 니이가타의 고시히카리 쌀로 솜씨 좋게 지어낸 밥이었다.
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유카타로 갈아입고 온천욕을 할 준비를 마쳤다. 유카타에 외투, 양말까지 풀세트로 갖춰놨는데 이날 처음 본 기모노용 양말이 아주 유머러스했다. 벙어리 장갑의 양말버전이랄까. 엄지발가락만 따로 나오게 만들어진 벙어리양말이었는데, 게다를 신기 위해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벙어리 양말(?)
▲온천에 가기 전, 유카타를 입고
온천시설은 츠루노유 온천에 비해 훨씬 편리했다. 운치는 덜했지만, 샤워시설이나 탈의실 등 편의시설은 훨씬 잘 갖춰놨다. 편백나무로 만든 실내탕과 돌을 쌓아 만든 노천탕은 인공적으로나마 훌륭하게 꾸며놓은 온천이었다. 내 취향엔 산 속에서 솟아나는 원천 그대로의 모습에 가림막만 두른 츠루노유 온천이 더 맞았지만, 이 료칸의 온천은 잘 다듬은 바위와 나무와 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유황성분이 들어있는 츠루노유와는 달리 약알칼리성 단순 온천수라 온천물을 좀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점도 장점이었다.
온천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방안에 놓여있는 텔레비전이 눈에 띄였다. 사흘만에 처음 보는 텔레비전이었다. TV 전원을 켜니 영어, 중국어, 심지어 한국어 채널까지 나오는 위성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 츠루노유 온천을 벗어나면서 잘 터지던 휴대전화 신호와 3G는 물론, 이 료칸에선 객실에서도 WiFi를 여유롭게 쓸 수 있었다. 훨씬 편리했지만 쉬는덴 불편했다. 전날까지의 환경보다 좀 더 익숙한 환경에 돌아왔지만, 기쁘고 편리하다는 느낌보다는 불편함이 그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신호 같아서 기분이 떨떠름했다. 휴가가 벌써 절반 넘게 지나가 있었다.
TIP
-위에도 썼지만, 신칸센 코마치는 전석 지정석으로 운행된다. JR패스 소지자도 좌석이 지정된 표를 새로 발권해야 한다. 패스를 내밀고 발권하면 추가요금은 없다.
-부피가 큰 짐을 갖고 신칸센을 탈 땐 발권시 객차 맨 뒷자리 표를 달라고 하자. 짐을 놓을 공간이 있다.
-에치고유자와의 료칸들에선 스키장비도 빌려준다. JR에서 운영하는 가라유자와스키장을 이용할 경우 JR패스를 이용한 할인가격이 더 쌀 때도 있으니, 가격 비교 잘 해볼 것. 스키 리프트권과 료칸 숙박권을 연계한 숙박상품도 있다.
-에치고유자와 거리 곳곳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다. 눈을 녹이기 위해 물을 뿌려대기 때문에 거리가 온통 물바다인 경우가 많다. 숙소에서 장화를 빌려준다고 하면 모양 빠지는 걱정을 하기 전에 감사하며 빌리는 게 낫다. 신발 버리기 딱 좋다.
-에치고유자와는 온천 인심이 후하다. 곳곳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족탕(足湯)과 수탕(手湯)은 물론, 무료 대중탕도 있다. 역 앞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지도엔 대중탕과 족탕의 위치도 표시돼 있다.
-에치고유자와의 료칸들에서 굳이 조석식을 다 해결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시내 곳곳에 맛집이 많다. 나카노야(소바), 심바시(소바), 닌진테이(돈까스), 오오스시(스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