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summer /Swiss/Day 4
루체른을 떠나는 날 아침엔 비가 내렸다. 루체른에서 안본게 뭐가 있나 꼽아보다가 갈지말지 전날 고민했던 '빈사의 사자상'이 떠올랐다. '오줌싸개 소년'만큼 막상 가보면 별거 없지만, 그래도 꼭 가서 봐야한다는 그것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로이스강변엔 비오는 날인데도 꽃시장이 섰다. 햇살은 비구름에 가렸지만 해바라기 색깔이 찬란했다.
▲그리고 이게 그 유명한 빈사의 사자상.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16세와 마리앙투와네트를 지키기 위해 숨진 스위스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다. 엄청난 조형물은 아니지만 사자의 표정은 아주 슬프고 처연하다.
여긴 아침부터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몹시 많았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사람 구경을 조금했는데, 아이를 데려온 프랑스인 부부가 사자상의 유래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듣게 한참동안이나 설명하는게 눈에 띄었다.
사자상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향했다.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이지만, 이번 여행에선 애초에 계획에 없는 도시였다. 베른이 하루를 투자하며 들르기엔 볼거리가 애매한 도시기도 하고, '베른'하면 생각나는게 선뜻 없어서 였던 것 같다. 루체른에서 체르마트로 가기 위한 기차 시간표를 보던 중, 루체른에서 체르마트에 일찍 가봤자 어차피 하이킹을 갈 수 있는 시간대도 아니고 애매할 거란 결론이 나왔다. 루체른에 좀 더 있을까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경유지이기도 한 베른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루체른에서 한시간쯤 걸려 베른에 도착하면 짐을 역 코인락커에 맡겨놓고 시내를 좀 돌아본 후 비스프(VIsp)를 거쳐 체르마트까지 가기로 했다. 체르마트에 도착하면 아마 저녁 7시쯤?
친구는 몰랐겠지만, 베른에 가자는데 동의한 이유 중 하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소설이나 영화의 무대 대부분은 햇빛 찬란한 리스본이라 베른은 그를 더 두드러지게 보이는 효과를 낳는 장치 같은 역할이긴 한데, 영화 초반에 나온 베른 장면이 내 기억엔 더 선연히 남았다. 빨간 지붕에 때가 묻은 낡은 건물들과 도시를 휘감아 흐르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강,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키르헨펠트 다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베른역에 내려 곰공원을 잠깐 보고, 아레강을 다시 건너 구시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길을 헤매며 찾아 올라간 건 베른대성당 종탑. 꼭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었다.
▲아레강엔 다리가 꽤 많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에 나왔던 그 '키르헨펠트 다리'
▲성당 종탑은 올라갈 때가 차라리 편하다. 내려올 때마다 현기증이 아찔하다.
뮌스터(대성당)에서 내려와 시가지 큰 거리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베른의 명물은 대부분 이 거리에 다 몰려있다.
사람들이 길가에 잔뜩 모여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각이 되면 인형이 나와 종을 치는 시계탑 '치트글로게(ZYTGLOGGE)'였다. 보고 싶긴 했지만, 기차 시간이 촉박해서 결국 인형쇼는 못봤다.
베른에서 기차를 타고 또 한시간 정도 가면 자그마한 역 '비스프'가 나온다. 기차에서 내려 너무 쌀쌀한 날씨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비가 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멀리 솟아 있는 산 위로 눈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비스프에서 체르마트까지 산악열차를 타는데 뒤에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미국여자애들이 Excuse me하고 불렀다. 이 열차가 체르마트에 가는게 맞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걔들은 뒤에 쟁여놓은 스키를 짊어지고 기차에 올랐다. 산악열차를 타고가는 내내 눈 쌓인 설산이 보였다. 처음엔 산 머리꼭대기에만 눈이 쌓여있었지만, 깊은 산속으로 갈 수록 쌓인 눈이 어깨로, 허리로 내려왔다. 체르마트에 도착하니 거의 입김이 나오기 직전의 싸늘한 날씨였다.
숙소는 역에서부터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생명의 보고와도 같은 할인마트 COOP 문닫기 직전이라 맥주, 주전부리, 식수 등등 간단히 장을 보고 나왔다. 장본 짐과 캐리어를 끌고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오른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린 순간 어디서 많이 본듯하면서 실물로 보기엔 매우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마테호른이 구름을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이 각도 저 각도로 찍고, 쩔은 행색이었음에도 얼굴을 들이댄 인증샷도 찍었다.
결국 찍길 잘했다. 체르마트를 떠날 때까지 마테호른을 이 정도로 확실히 본 적은 다신 없었다.
짐을 풀고 체르마트 시내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대부분 등산복 차림이었고, 대부분 가을 점퍼를 입었다. 문득 얇은 바람막이 하나씩에 패기있는 컨버스화를 신고왔다는 사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추워서 지퍼를 목까지 잠그고 잔뜩 움츠리며 걸었다. 체르마트 '반호프 슈트라세'의 역과 반대편 쪽엔 작은 교회가 있었다.
교회묘지가 그냥 묘지려니 지나갈만도 하지만, 이곳 묘지는 좀 특별하다. 묘석엔 자일 같은 등산 장비가 붙어있다. 고인의 나이는 20대 30대가 많고 심지어 10대도 종종 있다. 스위스 산골 조그만 교회의 묘지지만,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국적도 다양하다. 아까 우리에게 잠깐 모습을 드러내준 마테호른을 정복하려다 미처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은 이곳 체르마트 성 마우리티우스(St. Mauritius) 교회묘지에 누워있다. 체르마트 시내에서 마테호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교회묘지에 잠깐 들렀다가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렀다. 따뜻한 음식이면서 뭔가 익숙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여기서 김이 펄펄 나는 리조또와 파스타를 먹었다. 행복에 잠긴 표정은 스티커로 가려야지...
밥을 든든히 먹고 나오니 해가 저물었다. 추위는 조금 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