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summer /Swiss/Day 3
전날까지 날이 꾸물꾸물하더니 여행 셋째날(28일)엔 아침엔 날이 갰다. 숙소가 있는 프란치스카너 성당 앞 광장에선 새소리가 났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플랜더스의 개'나 '신데렐라' 같은 유럽 배경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침에 광장에 새소리 듣고 일어나서 발코니로 나가 창문을 열고 새가 확 날아가는 그런 장면을 좋아했는데, 그런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었다.
▲숙소가 있었던 프란치스카너 광장. '광장'이라지만 작은 분수대가 하나 있는 아담한 사이즈였다.
▲외국 가면 좋은게, 한국에서 실물 보기 힘든 강아지들 실사판을 볼 수 있는 거!
아침 일찍 역앞 맥도널드(...)에 가서 크루와상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오후 3시쯤 패러글라이딩을 할 계획이라 역에 있는 인포에 가서 부탁을 했는데, 인포 직원 말이 오늘은 오후 1시에나 날 수(!) 있다니 뭔가. 막 리기산 가는 배가 떠난 참이라 일정이 좀 꼬여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시에 패러글라이딩하러 가기로 예약을 하고, 시간이 좀 남아서 COOP에서 점심 거리를 좀 산 다음 필라투스 가는 배에 올랐다. 필라투스에 올라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냥 호수라도 구경해 볼 생각이었다.
▲호수 쪽에서 바라본 루체른 시가지.
배를 타고 좀 가다보니 점점 추워졌다. 시원한 바람을 맞겠다고 기어이 갑판에만 앉아있었는데 나중엔 너무 추워서 야상 지퍼를 목까지 전부 올려 잠글 정도였다. 암튼 어찌어찌해서 필라투스산 입구에 도착했고, 배가 10분 후에 출발한다고 해서 잠깐 선착장에 내렸다. 승객 대부분이 이 선착장에서 내렸다. 돌아올 때 배에 다시 탄 승객은 나와 친구 뿐이었다.
▲야상 지퍼 끝까지 올린 꼴
▲구름에 산머리가 가린 필라투스(Pilatus) 산. 본디오 '빌라도'할 떄 그 필라투스 맞다.
▲필라투스 선착장에 잠깐 내려서.
▲같은 배를 타고 루체른으로 돌아가는 길엔 배가 텅텅 비어서 다리를 쫙 펴고 앉아보기도, 마음껏 갑판에서 눈치 안보고 피크닉 기분 내며 싸온 샌드위치를 먹기도 했다.
배에서 점심을 먹고 루체른 선착장에 도착하니 얼추 약속시간이 돼 있었다. 패러글라이딩 업체 사람이랑 만나기로 한 장소는 역 앞 맥도널드였다. 차에 오른 우리는 한 30분 정도 루체른 교외로 이동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올라간 산은 해발 1923m의 니더바우엔(Niederbauen).
산 입구에 올라갈 때부터 길가로 보이는 낭떠러지와 그 아래로 보이는 파란 루체른 호수 물이 심상치 않아보이긴 했다. 니더바우엔 입구에서 산 위까지 걸어서 올라가려면 두시간 반쯤 걸리므로, 패러글라이딩을 할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탄다. 이 케이블카부터가 심장이 쫄깃해진다. 유리벽 이런거 없이 뚫려있어서 산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올라가면서 '끼익' 소리까지 난다. 가끔 잘 올라가다 '턱'하고 뭔가에 걸리더니 서버리기도 했다.
아무튼 산 위에 올라가고 나니 그제서야 패러글라이딩하러 올라왔다는 실감이 좀 났다. 별거 아닌 언덕에서 뛰어내리는 줄 알았는데, 그 산이 1900m가 넘는다는 걸 산 꼭대기에서야 듣고 기겁했다.(900m... 지리산 천왕봉이랑 대충 비슷한 높이잖아)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절대 패러글라이딩 쌩초보인 나 혼자 패러글라이딩을 혼자하진 못한다. 전문가 한 사람이랑 같이 타서 둘이 함께 내려오는데, 내 파트너는 내 나이 또래쯤 돼 보이는 '타냐(Tanja)'란 여자분이었다. 체구는 자그마한데 집채만한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끝까지 혼자 매고 다니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타냐는 나에게 하네스랑 이것저것 장비를 입히고, 씌우고, 걸어주더니 "All you have to do is just run"이라고 말했다. 이것저것 장비를 매고 타냐가 '런'이라고 외치자 시키는대로 열발짝쯤 달렸다. 대충 보니 더 가면 낭떠러지라 눈을 반쯤 감고 뛰었는데, 눈을 다시 떠보니 발이 허공에 떠 있었다.
▲이건 타냐의 권유로 방향 잡는 줄을 잠시 잡았을 때 찍은거. 사진은 당연히 타냐가 찍었다.
한 20분 정도 루체른 호수 주위를 날았다. 아침나절에 푸른 호수를 실컷 보았지만 하늘에서 호수와 그림같은 마을을 굽어보는 건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패러글라이딩은 바람이 부는대로 엄청나게 흔들릴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잔잔하게 마을 위를 유영하는 기분으로 내려왔다. 다시 루체른에 가도 이걸 할 거 같다. 아.. 멀미를 하는 사람은 좀 다시 생각해보는게 좋겠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루체른 시내로 돌아왔다. 멀미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진 친구와 함께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루체른 시내를 조금 걸었다. 날이 갠 후라 그런가, 도시는 북적거렸다. 음악소리와 사람소리가 섞여 듣기 좋은 도시 소리를 만들어냈다.
▲루체른 카펠교에서.
▲루체른을 흐르는 로이스(Reuss) 강
결국 몸이 덜 회복된 친구는 숙소에 누워있기로 하고, 난 스위스에 다녀갔던 누군가(ㅋㅋ)가 그렇게 찬양해 마지않던 리기산을 보기 위해 기어이 다시 배를 탔다. 사실 나도 속이 좀 안 좋았는데 호텔 침대 위에 30분 정도 누워있으니 얼추 가라 앉았다. 다행이었다.
리기에 가기 위해 다시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괜찮았다. 약간 구름이 끼긴했지만, 그래도 파란 하늘이 보이는 정도였다. 배에 혼자 타고 있으니 둘이 다닐 때와 달리 이런 저런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영어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배에서 마주친 스위스 사람이 말하길, 지금 리기산에 올라가면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일 거라고 했다. 결국 헤어지면서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I hope you to see something there"이었는데 이건 뭐.. 결국 그대로 됐다...ㅋㅋ;;;
비츠나우에서 내려 산악열차를 탔다. 열차를 타고 한 5분쯤 갔는데 저절로 나오는 '아...'하는 한숨소리. 분명히 출발할 땐 맑았는데, 어느새 구름이 잔뜩 껴 산허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기차를 타고 산꼭대기 역, '리기쿨룸'까지 갔다.
▲리기산 꼭대기 올라가는 길.
그리고 대망의 리기산 꼭대기, 리기쿨름(Rigi Chulm)역에 내리자 펼쳐진 광경은.... ㅋㅋㅋㅋㅋㅋ
앗 하는 사이에 바람이 휙 불더니 몰려온 구름이 역이고 산봉우리고 모조리 다 덮어버렸다.
어느 정도로 구름이 자욱했냐면, 한 2m 전방에서 풀 뜯는 소들이 희미하게 보여서 소 목에 달린 벨소리를 듣고 피해갔을 정도. 산 꼭대기 전망대도 올라가봤지만, 뭐가 보이기는 커녕 한치앞을 내다보기도 힘들었다. 하아...그렇게 기대했던 리기산인데 몹시 아쉬웠다.
기차를 타자마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산을 내려오는 기차는 하이킹에 나섰다가 비를 맞고 오들오들 떨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태우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뚫어버릴 기세로 맹렬히 내리는 빗방울을 헤치고 비츠나우 역에 내렸다.
유람선을 타니 아까 그렇게 잔잔하던 루체른호수에서 파도가 쳤다. 배에서부터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여행 사흘째 되는날 벌써 국물 생각이 나다니...
선착장에 내려 또 다시 비를 뚫고 숙소까지 갔다. 젖은 청바지를 말리기 위해 장롱위에 걸어놓고, 뜨거운 물로 씻고나니 조금 기운이 났다. 친구가 한국에서 가져온 귀한 컵라면을 하나 나눠줘서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컵라면을 끓였다. 컵라면 국물 한방울마저 털어넣고, 얼굴 부을 걱정도 잊어버린채 침대에 등을 붙인 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