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돈 카를로' @국립극장(2014. 5. 23)
(공연정보 검색이 안 되므로...) ★★★★
지휘 : 정민
연출 : 엘라이저 모신스키
필리포 2세 : 강병운
돈카를로 : 나승서
로드리고 : 공병우
엘리자베타 : 박현주
에볼리 : 정수연
종교재판관 : 양희준
수도원장 : 전준한
테발도 : 최우영
연주 :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지난해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공연한 국립오페라단의 '돈 카를로'를 놓쳤다. 두고두고 아쉬워하던 공연이었는데 당시의 캐스팅으로 딱 이틀간 국립극장에서 '돈 카를로'를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예매했다. 1998년 이후 15년 만에 한 작품을 1년 만에 다시 하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돈 카를로'는 크고, 무겁고, 어려운 작품이다. 계모가/의붓아들이 된 옛 약혼자에 대한 사랑, 아들을 사랑하는 왕비와 극단으로 치닫고만 부자간의 갈등, 왕의 측근이면서 정치적 신념과 친구에 대한 우정을 지키기 위한 갈등 등 장장 4시간에 가까운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소화하려면 가창은 물론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을 연기력 또한 뒷받침돼야 한다. 운 좋게 본 '돈 카를로'는 좋은 공연이었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다. '돈 카를로'가 아니라 '돈 필리포'나 '돈 로드리고'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
필리포 2세 역 강병운(베이스)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다. '최고의 필리포'라는 찬사를 이제야 확인할 수 있게 돼 안타까울 정도였다. '필립 강'이라는 예명을 '필리포'에서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했는데, 사실상 이날 공연을 '돈 필리포'로 만들었다. 물론 성악적인 측면만 본다면 전성기를 지나 66세의 적지 않은 나이의 한계가 드러나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더러 탁하고 흔들리는 목소리를 연륜이 만들어낸 카리스마로 다잡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3막 1장 필리포의 아리아 'Ella giammai m'amo(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담담하고 슬펐지만, 그만큼 강했다. 괜히 강병운에게 '금세기 최고의 필리포'라는 어마어마한 별명이 붙여진 게 아니었다. 한 음, 한 호흡을 놓칠세라 숨을 멈추고 들었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날 공연 내내 수시로 터져 나온 '브라보' 부대마저 양심은 있었는지, 이 아리아가 끝난 후엔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숙연한 정적이 흘렀고, 울컥하는 순간 긴 박수가 쏟아졌다.
타이틀 롤인 돈 카를로 역을 맡은 나승서(테너)의 섬세한 표현과 미성은 오디오로 들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돈 카를로의 등장장면에서 실황공연이 줘야 할 감동이 충분하지 못했다. 특히 이러한 약점은 독창보다 다른 배역과 함께 등장했을 때 두드러졌는데, 1막 2장 수도원 장면에서 엘리자베타와의 듀엣 'io vengo a domandar'의 절절함,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로드리고와 부르는 이중창 'Dio, che nell'alma infondere'에서 느껴져야 할 장중함이나 패기는 아쉬웠다. 엘리자베타 박현주(소프라노)의 목소리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음성이다. 쇳소리가 많이 나는, 좋게 말하면' 칼라스 스타일'의 소프라노랄까. 역시 나승서와 마찬가지로 실황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련의 여주인공인 엘리자베타인데, 연기만 보면 그다지 불쌍하지 않다.
뜻밖의 발견은 로드리고 역 공병우(바리톤)와 에볼리 역 정수연(메조소프라노)이었다. 특히 에볼리 정수연은 지난해 공연에서 더블캐스팅됐던 차라, 이 팀과의 조합이 궁금했는데 아주 매혹적인 에볼리였다. 1막 '베일의 노래(Nel giardin del bello)' 에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등장했는데, 왕비를 조롱할 만한 위상의 왕의 정부 역에 완전히 녹아든 연기까지 보여줬다(오히려 왕비보다 왕비 같은 정부 역에 딱이었다). 난이도 높은 아리아를 부르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에볼리는 실제로 당대 스페인 최고의 미녀였다는데, '베일의 노래'가 끝난 순간 진짜 에볼리가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였다. 이렇게 위풍당당했던 에볼리가 쓴 맛(?)을 보고 복수를 다짐하지만, 결국 자기가 초래한 파국에 경악하며 부르는 3막의 아리아 'O don fatale'는 처연함이 어린 광기가 묻어났다. 공병우 또한 등장부터 죽음까지 호연했다. 베르디 바리톤을 하기에도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고, 필리포와 카를로와의 호흡도 좋았다. 에볼리를 만나 능청스러운 모습부터, 진지한 이상가이자 친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최후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로드리고 역을 흠잡을 곳 없이 소화했다.
정명훈 서울시향 음악감독의 아들 정민이 지휘봉을 잡고 이끌었던 프라임필하모닉의 연주는 대체적으로 무난했다. 지난해 공연부터 금관 파트가 계속 지적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내 오케스트라의 금관 파트 지적이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만 삑사리는 시정돼야 할 듯싶다. 아토차 광장 장면이나 '베일의 노래' 간주에서 음반으로 듣던 짱짱한 금관 연주가 받쳐주지 않아 아쉬웠다. 국립합창단은 아토차 광장 장면에서 특히 빛났다.
엘라이저 모신스키의 연출은 크게 문제 삼을 장면은 없었지만, 이 복잡한 얘기 중 대체 어디에 포인트를 맞추려는 건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아 다소 산만한 느낌도 있었다. 국가의 폭력과 이상의 갈등, 권력자의 고독, 부자간 갈등, 우정, 비극적 사랑 중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었다면 더욱 머릿속에 남는 장면도 많았을 것 같다. 카를로 5세의 유령이 강제로 손자인 돈카를로를 끌고 가는 마지막 장면 연출은 좀 아니었다. 카를로의 체념인지, 좌절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결말이 됐다. 16세기 스페인풍을 살리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의상과, 콘크리트 기둥으로 감옥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조명으로 분위기를 달리한 활용도 높은 무대 디자인의 세련된 면은 국립오페라의 다른 무대들도 기대하게끔 하는 요소들이었다.
P.S
이날도 '브라보 부대'는 물 만났다. 필리포/카를로/ 로드리고 곡 끝난 직후 1층 뒤쪽에서 몇명이 돌아가며, 진득한 벨칸토 발성으로 뒤에서 "브라보 브라비". 작년 서울대 문예관에서 한 학생 공연 '돈파스콸레'랑 별다를 바 없는 분위기. 그 밖에도 알사탕 깨물어 먹고 스토리 설명하는 분들 등등 공연장 매너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슬프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