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NOTE]냉면파시즘과 냉면소수자
▲자료사진/ '봉피양'의 냉면과 녹두부침(위 이미지는 본문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광화문에 위치한 전 직장에 다닐 때 일이다. 기자 중에선 입맛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밥은 그냥 바쁜 와중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반대 유형도 물론 많았다). 아무튼 그날도 맛있는 걸 먹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스크에게 이끌려 택시를 타고 을지로의 한 냉면집으로 향했다. 광화문에서 을지로는 멀진 않지만, 그렇다고 푹푹 찌는 여름날 걸어갈 거리도 아니므로 택시를 나눠탔다. 나와 택시를 함께 탄 사람은 나보다 몇년 일찍 입사하고 몇살 더 많은 선배였다.
그 선배는 우리가 곧 도착할 냉면집이 얼마나 위대한 집인지에 대해 찬양했다. 그 집의 편육을 소주와 함께 먹으면 얼마나 기막힌지, 근처에 있는 그 냉면집의 자매집에서 파는 만두도 얼마나 괜찮은지에 대해서 한참 얘기가 오갔고, 회사에서 가장 막내기수였던 나는 끼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그 선배가 물었다.
"넌 을지면옥 가봤어?"
'네'라고 미처 대답하기 전, 그 선배는 "하긴 넌 아직 어려서 안 가봤겠지. 을지면옥 냉면은 애들이 처음 먹고 맛있다고 하기엔 좀 심오한 맛일 수 있는데, 너도 처음 먹어보면 그럴거야"라고 나 대신 말했다. 이어 선배는 자신이 처음 을지면옥 냉면 맛을 봤을 때 그 심심함이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그러나 심오한 평양냉면의 진리를 깨치면서 얼마나 그 집 냉면에 빠져들게 됐는지에 대해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맛집 찾아다니는데 유별난 취미가 있던 부모님 덕에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이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과 의정부 평양면옥을 전부 가봤다는 이야기를 그날 꺼내지 않았다. 평양면옥 계열 식당의 냉면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은 아니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날 택시 안 분위기에서 느낀 을지면옥은 이제 갓 미식의 세계에 입문한 '애기'가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드나들었다고 감히 말씀 올리기엔 너무나도 존귀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술 더떠 퇴근길 택시를 타고 막히는 길 30분을 감수해가며 찾아가 먹는 궁극의 냉면을 '내 취향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일은 신성모독에 가까웠으리라.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에 가면 아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많았다. 의정부 평양면옥 계열(의정부 평양면옥이 오리지널, 을지와 필동은 그집 딸들이 하는 곳이다) 냉면은 무채색에 가까운 냉면 한그릇에 빨간 고춧가루로 준 액센트가 일단 강렬한 첫인상이다. 단순한 비주얼만큼이나 심심하리만치 단순한 맛엔 오랜 여운이 있다. 여기에 어릴 적부터 드나들어봤다는 추억과 노포 특유의 분위기를 얹으면 충분히 행복한 식사가 된다. 을지면옥의 편육이나 필동면옥의 만두도 사이드 메뉴로 훌륭하다(이 글을 쓰면서 문득 생각났는데 요즈음 들어 을지면옥이 약간 간이 세진 느낌이 있다).
그러나 나는 평양면옥 계열이 곧 냉면의 바이블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구원 받아야 할 초딩 입맛을 가진 중생이라는 시각엔 동의할 수 없다. 냉면 좀 먹어봤다 하는 사람들치고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을 궁극의 냉면으로 꼽지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분명 취향을 탈 것 같은 맛인데도 그렇다. 이구동성으로 괜찮다고 하는 냉면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문제는 취향타는 이런 스타일이 바이블이 된 점이다.
작년 여름 어느날 을지면옥을 찾았다. "난 이 집 냉면 취향이아닌가봐"라고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하자 상대방이 대답했다. "아직 이 집 냉면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래". 그래도 이건 아주 점잖은 코멘트에 속한다. 평양면옥 스타일에 반론을 제기하면 '아직 냉면을 모른다' '애들 입맛' 같은 반응까지도 감수하곤 했다. 평양면옥 계열이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최고의 냉면으로 여기진 않는 '냉면소수자' 입장에서 보면, 단지 냉면 취향 때문에 초딩 입맛으로 낙인 찍히는 건 억울한 일이다.
서울에만 수천곳쯤 될 냉면집 중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곳만 추려도 대략 10곳쯤 될 것 같다. 이렇듯 강호의 냉면 취향이 다양한데, 노포라는 이유로 이미 냉면의 규범을 만든 것인양 평양면옥파가 냉면 기득권을 휘두르는게 아닐까. 냉면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마땅한데, 평양면옥 계열만을 참된 냉면으로 공인하는 것은 다수의 횡포, 나아가 냉면을 획일화 시키려는 냉면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맛있는 것을 찾아먹는 건 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일이 아니던가. 미식 자체로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사소한 냉면 취향에서마저 우월감을 느끼며 취향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조금 위험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난 초딩 입맛으로 매도 당하지 않기 위해 평양면옥파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을 냉면소수자들도 어딘가에 많이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근 20년간 나의 취향 또한 굳건하다. 역시 을지로에 있는 어떤 냉면집에서 파는 육향 진한 순면이 먹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