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eidoscope/공연

KDB대우증권 창립44주년 공연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014. 10. 10)

AlixJ 2014. 10. 11. 22:00


          나의 평점&한줄평 : ★★★★ 질박하지만 역동적인 러시아 소리, 달려나가는 조성진



Tchaikovsky Francesca da Rimini
차이코프스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d flat minor Op.23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d flat 단조 Op.23

Rimsky-Korsakov Scheherazade Op.35
림스키-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Op.35



가는 길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던 공연이었다. 예술의전당(이하 예당) 공연 시간이 오후 7시 30분일 것이라곤 한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일에서야 알게됐다. 도저히 제 시간에 퇴근했다간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교통상황을 체크한 후 양해를 구하고 10분 일찍 나왔다. 잡아탄 택시는 우면산을 향해 달렸다. 샌드위치 연휴 가운데 낀 금요일은 호재였다. 평소보다 덜 막힌 길 덕에 무사히 예당 콘서트홀에 도착해 프로그램까지 사 들고 자리에 앉았다. 

러시아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도, 러시아 특유의 소리도 좋아하는 탓에 큰 맘 먹고 좋은 자리를 질렀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순간 쾌재를 불렀다.  무대가 성큼 다가오는 듯한 압도감이 느껴졌다.


공연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로 시작했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제5곡에 나오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작곡됐다는 곡이다. 도입은 다소 산만했다. 현악 파트는 날이 서 있고, 지옥에 본격 빠져들기 전 불안한 모습을 그려내야 할 금관은 제 자리를 찾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 오케스트라들의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금관이기에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정작 이날 공연 내내 몰입을 방해했던 요소는 따로 있었으니, 도입을 지나 1주제 초반의 목관 악기들의 트릴 부분에서 바로 드러났다. 플룻, 호른 등등 목관 전체가 불안했다. 곡이 중반을 지나면서 총주 부분은 안정을 찾았고,  3주제 후반부의 강렬한 연주는 지옥문이 열리는 듯한 극적인 묘사를 해냈다. 전체적으론 오늘 공연이 섬세하다기보단 질박한 느낌이 될 거란 첫인상을 줬다.

1부 두번째 곡은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곡인 피아노 협주곡 1번. 협연자는 지난 5월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한 조성진이었다. 조성진은 당시 파이널에서 이 곡을 쳤고, 오케스트라가 별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만한 좋은 연주를 보여줬다.

웅장한 호른 연주로 시작하는 도입부 첫 6마디에 이어 피아노 연주가 나오자 잠시 '어'했다. 조성진은 1악장 처음부터 '달려나갔다'. 미스터치 거의 없이 휘몰아치듯 연주하는데 흠칫 놀랐다. 오케스트라와 종종 안 맞는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 지휘자가 사인을 줬던 것 같은데 1악장 후반부까지 거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던 듯. 거의 재즈 느낌이 날 정도로 유연한 루바토가 인상적이었다. 나쁜 건 아닌데 특이한 연주였다. 2악장에선 플룻과의 호흡이 아쉬웠다. 사실 이건 조성진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2악장 주제선율을 제시해야할 플룻이 박자를 놓치는 등 아마추어 수준의 연주를 한 탓이 컸다. 서정적인 안단테와 해학적인 스케르초를 섞어놓은 2악장에서 피아노의 표현력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사뿐사뿐하게 시작해 서정적인 주제로 이어지는 2악장 카덴차는 조성진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플룻을 비롯한 목관은 이 악장이 끝날 때까지 아쉬웠다. 3악장에서 조성진은 다시 '달려나갔다'. 마지막 피아노 코다 부분에서 조성진은 강렬한 옥타브를 던지며 피아노를 '일어나서' 쳤는데, 몸을 던지는 듯한 움직임에 맞게 연주 또한 벅차 올랐다. 므라빈스키의 후계자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한 오케스트라 총주 또한 날카로우면서도 힘이 넘쳤다. 폭주하는 3악장 후반부의 잔영은 인터미션 때까지 얼얼하게 남았다.

인터미션 전 조성진은 쇼팽 녹턴 20번을 쳤다. 테크닉적으론 좋았고, 아직 스무살이라는 어린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감수성 또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앞으로도 잘 '달려나가길' 기대되는 피아니스트였다.

2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한곡으로 구성됐다. 김연아가 2009년 세계 선수권에서 프리스케이팅 음악으로 사용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곡이다. 악장 레프 클리치코프는 아라비안나이트를 1000일 동안 끌어온 여인에 걸맞는 은은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연주로 세헤라자데를 표현하는 처연한 바이올린 솔로를 연주했다. 섬세하고 요염하다기보단 무심하지만 힘이 있었달까. 신밧드의 모험을 표현한 1악장에서 상트필의 현악부는 풍성한 선율과 빠른 템포로 거친 파도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1부에서 소극적인 금관이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고 느꼈는데, 2악장에서도 주제 선율 중 하나를 연주하는 트롬본 연주는 웬일인지 맥 없었다. 포효까진 아니더라도 힘차게 질러주는 맛이 필요했건만 화려한 금관 선율이 살지 않아 아쉬웠다. 3, 4악장에선 퍼커션이 돋보였다. 작은북의 리듬은 다른 악기와 주고 받는 파트가 많은 3,4악장에서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샤리아르 왕과 세헤라자데의 주제와 1,2,3악장의 주제들이 변주돼 반복되면서 바그다드의 축제를 표현한 4악장에선 특히 타악과 저음현 파트가 전체적인 흐름을 잃지 않으면서 바그다드 축제의 흥분을 살려내도록 리드했다.

앵콜곡은 차이코프스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파드되(pas de deux)'였다. 우아하고 드라마틱한 연주가 끝나자 곳곳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테미르카노프는 전체적으로 세세한 표현이나 테크닉에 중점을 뒀다기보단 흐름과 '러시아 느낌'을 강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갑고 투박하지만 대신 진중하면서 풍성했다. 다가가기 쉽지 않지만 깊은 맛이 나는 연주는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다. 음반으로는 100% 듣기 힘들었을 색채와 질감을 느끼며, 상트필의 실연은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상트필이 다음에 내한한다면 또 올 것 같다.